[고전산문] 성벽 안의 여우, 사당의 쥐(城狐社鼠)
조조의 위나라를 접수한 사마염이 진(晉)을 건국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이후 30년 만에 황족인 사마씨 간의 권력다툼, 즉 8왕의 난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틈을 타서 흉노족(유목민족을 통칭하는 말)의 유연이 건국한 한(韓, 훗날 조趙로 개명함) 나라가 낙양과 장안을 차례로 함락하여 진은 몰락하고 마침내 중국 북부의 지배권을 잃고 만다. 당시 건업에 피신하고 있던 황족인 낭야왕 사마예는, 이 소식을 듣자 건업을 건강(建康, 훗날의 남경 南京)으로 개명하여 진의 수도를 장안에서 건강(建康)으로 천도를 선포하고, 진(晉)의 황제로 등극하였다(317년). 이가 진원제(晉元帝)다. 사마염이 최초로 건국한 진을 서진, 사마예가 건국한 진을 구별하여 동진이라 부른다. 조조의 위나라, 사마씨의 서진, 동진의 시대를 '위진시대(220~ 420)'라 한다. 이후 훗날 수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 이민족으로 화북지방을 지배하던 전조(前趙)와 전조에 반기를 들고 조(趙)나라를 건국(319년)하여 후일 전조를 멸망시킨 후조, 그리고 한(漢)족이 중심이 되어 강남지역을 기반으로 연이어 건국한 송(宋, 후대의 송나라와 구별하여 유송劉宋이라 함), 제(齊), 양(梁), 진(陳)나라로 이어지며 중국대륙이 남북으로 양분된 시기를 '남북조시대', 이 모두를 합쳐서 '위진남북조시대'(220~589)라 한다.
동진의 대장군 왕돈(王敦)은 사마일족과 함께 진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운 산동 왕씨 출신으로 일족이 모두 명문세가를 이룬 귀족출신이다. 진원제(晉元帝)가 동진의 황제로 즉위하는데 큰 배경이 된 것이 바로 왕돈의 일족이다. 진원제는 동진의 황제로 즉위하자, 왕조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왕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유외(劉隈)와 대연(戴淵)을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임명하여 각각 군사 일만 명을 주어, 대장군 왕돈의 주변에서 견제하게 하였다.
진원제가 직접 군사를 동원하자, 의도를 바로 간파한 왕돈은
군사를 일으켜 맞대응을 하는 적극적인 대비책을 세웠다. 그러나 만약 군사를 동원하여 도성을 공격하면 반란이 되기 때문에 적절한
명분이 필요했다. 숙고 끝에 왕돈은 “유외(劉隈)가 나라를 망치는 간사한 무리이니, 왕의
신변에서 빌붙어 사는 그와 같은 간신들을 제거하여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왕돈은
수하인 사곤(謝鯤)을 불러 지혜를 구하자, 사곤은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조언했다. 사곤이 말하기를,
“유외는 간신이지만 성벽에 숨어 사는 여우이며, 사당(祠堂)에 자리잡고 사는 쥐입니다. 여우나 쥐는 왕 곁에 있는 간신의 무리를
말합니다. 성벽에 굴을 파고 숨어 사는 여우와 사당을 집으로 삼아 사는 쥐는, 몸을 안전한 곳에 두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며
나쁜 짓을 합니다. 하지만 감히 잡아서 없애기 어려운 이유는, 왕이 사는 궁성(宮城)에 숨어 있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행여 궁성이나 사당을 훼손할까 염려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돈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수도인 건강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진원제는 왕돈이 군사를 동원하여 엄청난 군세로 압박을 해 오자, 위협을 느끼고 몹시 두려워하여 화해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왕돈은 명분으로 내세운 그대로, 자신을 모함하고 적대시한 간신배들을 모두 숙청하고, 군대를 회군하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출전: 진서(晉書) 卷49/ 列傳第19 / 사곤전(謝鯤傳)-
※옮긴이 주: 위의 글은 사자성어, '성호사서(城狐社鼠)'의 유래가 되는 기록이다. '직호사서(稷狐社鼠)' 라고도 한다. 성호사서의 교훈은, 쉽게 손대기 어려운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권력형 기득권의 적폐 청산은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이나 희생을 능히 감수할만한 의지와 용기 그리고 결단이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를 관점을 바꾸어 타인이 아닌 내 문제, 즉 개인의 문제에 적용하여도 그 의미는 그대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