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혈구지도(絜矩之道) / 예기정의(禮記正義)
공자(孔子)가 “송사(訟事)를 판결(聽)함은 나도 남과 같다(나도 남들처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백성들이 송사함이 없게 하겠다.(억울해서 재판을 거는 일이 없게 하겠다)”라고 하였으니, 진실하지 않은 자가 그 터무니없는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함은 성인(聖人)이 백성의 마음을 매우 두렵게 해서이니, 이것을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몸을 닦음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몸에 분노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으며, 듣고 있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고 있어도 제 맛을 모른다. 이것을 몸을 닦는 것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함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함이 자기의 몸을 닦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친하게 여기고 아끼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기에게 비유해보며, 자기가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기에게
비유해보며,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기에게 비유해보며, 자기가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기에게 비유해보며 자기가 깔보고 업신여기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기에게 비유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며, 미워하면서도 그의 좋은 점을 아는 자는 천하에 드물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자식의 나쁜 점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무도 자기 집 모종의 큼을 아는 이가 없다.” 이것을 몸이 닦이지 않으면 자기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자기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집안을 교화하지 못하면서
나라 사람을 교화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안을 다스리는 도(道)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나라에 교화를 이룰 수 있다. 효(孝)는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요, 제(弟)는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요,
자(慈)는 대중을 부리는 방법이다. 〈강고(康誥), 詩經〉에서 “갓난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라.”라고 하였으니,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그것을 구하면 비록 딱 맞진 않더라도 멀리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자식을 기르는 방법을 배운 뒤에 시집가는 자는 없었다.
한 집안이 인(仁)을 실천하면 온 나라가 인(仁)을 일으키고, 한 집안이 사양(辭讓, 겸손함으로 양보함)을 실천하면 온 나라가 사양을 일으키고, 한 사람이 이익을 탐하면 온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이니, 그 기틀이 이와 같다. 이것을 한 마디 말이 일을 그르치며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자기에게 있게 된 뒤에 남에게 요구하며, 자기에게 없게 된 뒤에 남을 비난하는 법이다. 자신에게 간직된 것이
충실(忠實)하지 못하고서 (남을 너그럽게 대하거나)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이 자기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경
詩經≫에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이여. 그 잎이 무성하도다. 이 아가씨의 시집감이여. 그 집안의 사람에게 잘하겠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집안의 사람에게 잘한 뒤에야 나라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 ≪시경≫에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다.”라고 하였으니,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 뒤에야 나라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 ≪시경≫에 “그 거동이 잘못되지 않아 이 사방의 나라에서 어른이 될 수 있도다.”라고 하였으니, 그 부자와 형제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은 뒤에야 백성들이 그를 본받는다. 이것을 나라를 다스림이 자기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함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천하를 공평하게 다스림이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노인을 공경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키며, 윗사람이 어른을 존경하면 백성들이
제(弟)를 일으키며, 윗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근심하면 백성들이 등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 혈구란 길이의 척도를 재는 도구다. 즉 혈구지도란, 자기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가 있다.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앞장서서 하지 말며, 뒤에 온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왼쪽 사람과 교제하지 말며,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 것, 이것을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한다.
-대학(大學) 第四十二, 예기정의(禮記正義) 권60 -
▲원글출처: 동양고전종합DB(http://db.cyberseodang.or.kr)
※옮긴이 주: 예기(禮記)는 유교의 핵심적인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오경(五經, 시, 서, 역, 춘추, 예기) 중의 하나다. 예기는 글자의 뜻 그대로, 삼대 이래로 전해져 내려 온 예(禮)에 관한 학설, 개념, 가르침 등을 모아서 기록하고 주석을 단 책이다. 중용과 대학은 원래 예기에 속해 있다가 송대(宋代)에 와서 각각의 단행본으로 분리되어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포함되었다. 예기(禮記)를 해설한 주석서가 바로 『예기정의(禮記正義) 』다.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이 편찬하였다. 공영달은 후한 말의 학자인 정현(鄭玄)의 예기 주석을 바탕으로 웅안생(熊安生)·황간(皇侃)의 『의소(義疏)』를 참작해 독자적인 정리를 하였다. 예기정의(禮記正義)는 정주공소(鄭注孔疏)라 하여 정현의 주(註, 해석)와 공영달의 소(疏, 설명)를 원전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