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깊은 沼에서만 - 함석헌
물고기는 깊은 沼에서만
老子 36장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勝剛, 弱勝强, 魚不可脫於深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장욕흡지, 필고장지, 장욕약지, 필고강지, 장욕폐지, 필고흥지, 장욕탈지, 필고여지, 시위미명, 유승강, 약승강, 어불가탈어심연, 국지리기, 불가이시인.
모으려 할 때는 반드시 흩으는 법이요, 약하게 만들려 할 때는 반드시 세게 만드는 법이요, 무너뜨리려 할 때는 반드시 일으키는 법이요, 뺏으려 할 때는 반드시 주는 법이니, 이것이 이른바 숨은 밝음이다.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나니, 고기가 깊은 소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요, 나라의 날 선 그릇을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 이니라.
이것은 노자의 말인데, 작게 말하면 개인의 「제심탈정(制心奪情)」, 마음을 억제하고 정욕을 이기는 방법, 크게 말하면 어진이의 나라 다스리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그 길이 뭔가? 한 마디로 유약(柔弱)이란 말이다. 歙과 張, 弱과 强, 廢와 興, 奪과 與는 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지만 그 이쪽을 얻으려면 반드시 저쪽을 먼저 쓰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누구나 아는 일이다. 노자가 먼저 將欲款之에 必固張之요 將欲弱之에 必固强之며, 將欲廢之에 必固興之요 將欲奪之에 必固與之라고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蘇由의 말대로, 하나의 지혜밖에 되지 않는다. 관중(管仲) 손무(孫武)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관중은 중국 전국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요, 손무는 그때의 놀라운 전술가여서 세상이 그들을 영웅으로 치지만 그들이 정말 천하를 건지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재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하(天下)는 신기(神器)라 불가위야(不可爲也)라, 꾀로는 못한다. 어짊으로만 할 수 있다. 어짊과 재주가 비슷한 듯하나 다르다. 꾀는 지식에서 나오지만 어짊은 참이치를 깨닫는데서 나온다. 비유해 말한다면 어진이는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쓰는 의사요 재주 를 부리는 자는 이익을 얻기 위해 약을 파는 장사치다. 그 차이는, 결과를 보느냐 그 결과 밑에 숨어 있는 도를 위하느냐에 있다. 누구나 그 결과를 얻어 내 것으로 삼기는 쉬워도 그 도를 얻어 전체에 살기는 어렵다. 그래서 微明이라 했다. 그것을 가졌으면 못할 것이 없으니 明이다. 밝음이다.
그러나 보통 밝다면 환한 것이어서 모를 사람이 없지만 이 천하 만물을 살리는 참 빛은 빛 아닌 빛이다. 그러므로 夷요,希요, 微라고한다. 숨은 빛, 가리워진 빛이다. 예수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왜 숨겨져 있고 가리워져 있나? 물건이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일은 힘의 표현이다. 힘은 강하지만 강하기 때문에 약하다. 그것은 이것은 될 수 있어도 저것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고우나 향기가 될 수 없고, 향기가 취하는 듯하나 맛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있음은 곧 “나다”함이라. 자기주장이다. 자기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주장을 아니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 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그래 노자는 말 첫머리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明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전체는 물건이나 일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 보인다. 누구도 짓밟을 수 있는 것이 道 곧 길이요, 언제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다.
세상에 악이 있고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 악과 불의가 있으면서도 세계가 서 가는 것은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은 없다. 노자는 이래서 도를 柔한 것,弱한 것으로 체험했다. 그래서 네 가지로 실례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柔勝剛이요 弱勝强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목구비를 가지고 지각이 있은 담에 剛해야 이기고 强해야 이기는 줄을 모르겠나? “힘이다!” “힘은 힘으로만 이긴다!” 하고 외치는 것은 그것을 어린애도 다 알 수 있을 줄 알기 때문이다. “주권은 총구멍에서 나온다” 하는 모택동이 잘난 것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새삼 혀를 차는 인간들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을 그가 말해서야 알았던가? 벌써 역사 시작될 때부터 그것 아닌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할 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던가? 힘 숭배 아니 한 나라 없건만 어느 나라가 영원히 섰던가?
알 수 있는 데 문제가 있는 것 아니다. 알 수 없는 데 정말 문제가 있다. 힘이 장한것 아니라 힘을 힘있게 하는 것이 정말 장한 것이다. 정말 장한 것이 힘이라면 모든 힘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힘쓰지 않고 꾀부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요 어머니라. 어버이 앞에 힘을 뽐내는 자식이 위대한가? 그 자식을 낳아 기른 어버이가 위대한가? 자식을 낳아 기른 것은 힘과 꾀는 아니었다. 입신출세한다고 모든 사람이 힘을 다듬고 재주를 닦았다. 그리하여 제각기 하늘을 찌르는 바위처럼 일어섰다. 그것을 영웅이요 재사라고 했다. 治國平天下한다고 모든 나라들이 富國強兵을 부르짖고 세계 정복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제각기 세상을 삼키는 홍수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모든 것이 거품처럼 모래처럼 허무의 바다 밑으로 들어갔고, 남은 것은 영원을 아뢰는 물소리뿐이다. 무엇이 정말 이기는 것이요 정말 위대한 것인가? 柔요 弱이다. 영웅 재사 나라가 다 가고, 남아 있는 것이 누군가? 노자요 공자요, 석가요, 예수 아닌가? 그들의 부르는 노래가 무엇인가? 仁이요, 사랑이요,慈悲요, 無爲自然 아닌가? 그것이 다 부드러운 것이요. 약한 것이다. 이날까지 모든 강자 지자(智者)는 자기의 강과 지를 더하기 위해 그것을 내세우고 찬양하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찌됐느냐하면, 자기보다 더 강하고 더 재주 있는 대적을 불러일으킨 것뿐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망하는 길을 팠다. 여기가 재미있는 곳이요, 미명(微明)의 微明됨이 있는 곳이다.
악한 자는 누가 치는 것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치고, 누가 망하게 하는 것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망한다. 마치 떠오르는 오색 찬란한 비누 방울이 제 힘으로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질로 되고 힘으로 되고 욕심으로 된 이 세계에 비누 방울 아닌 것 없다. 이것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 微明이다. 어진이가 다른 것 아니라 하늘 뜻대로 하는 사람이요, 하늘 뜻이 다른 것 아니라 나로라 하지 않는 것이다. 모으려 할 때 모아지지 않고 흩으며, 약하게 만들려 할 때 약하게 만들지 않고 세게 하며, 무너뜨리려 할 때 무너뜨리지 않고 도리어 일으키며, 주려할 때 주지 않고 도리어 뺏는 것은, 흩어진 것을 흩어진대로 가만 두면 반드시 스스로 모이는 때가 오고, 센 것을 센대로 가만 두면 반드시 스스로 약해지는 때가 오고, 일어난 것을 일어난 것대로 가만 두면 반드시 스스로 무너지는 때가 오고, 가지는 것을 가지는 대로 가만두어 주면 반드시 스스로 내놓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을 내가 하려 하지 않고, 도 그 자체가 하도록, 종교적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맡겨두는 것이다. 이것이 곧 어짊이요 밝음이라. 그렇게 하면, 내 힘으로 하지 않고 진리 그 자체가 하도록 내맡기고 순종하면,無爲而無不爲라, 아니 될 것이 없다. 돼도 된 것이요 안돼도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데 나라가 왜 잘못되겠는가? 그럼 요점은 뭐냐? 뽐내지 않는 데 있다. 자랑을 해서는 아니 된다. 자랑은 곧 자기주장이요, 자기주장은 곧 억지요, 폭력이다. 모든 개인 모든 나라는 이 뽐냄, 자랑, 억지 때문에 망한다. 그것을 못박아 말하자는 것이 마지막 귀절이다. 魚不可臉於深淵이다. 고기는 깊은 소 밑에 가만 업디어 있어야지 나오면 죽는다. 고기는 아무 무기를 가진 것이 없다. 유약(柔弱)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고기가 깊은 소 밑에 가만 업디어 있으면 어떤 지혜도 힘도 그를 해할 수 없다. 저는 無智無力 하지만 그 소의 깊음을 힘입어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기가 가만히 업디어 있지 않고 한 번 제 힘과 재주를 뽐내기 위해 물위로 올라오면 그때는 무력한 하나의 반찬감 밖에 되는 것 없다. 어린아이도 능히 그것을 낚어 낼 수 있고 꿰어낼 수 있다. “자랑 끝에 불난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이기를 남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
그럼 그 國之利器가 무엇이냐? 이기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대로 모든 정교하게 된 무기다. 비행기, 탱크, 폭탄, 핵무기, 군함, 다 利器다. 그것을 남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어느 왕자가 나라의 무기고를 다른 나라 사신에게 보여 주었다가 크게 잘못됐던 일이 있고, 구약에는 히스기아 왕이 앗시리아 사신에게 나라의 곳간을 자랑해 구경시켰다가 후에 나라가 망하고 그것을 다 뺏겼던 일이 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가 임금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책망을 했었다. 그러나 나라의 국방 비밀을 누설해서 안되는 것쯤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노자가 그것을 걱정해서 한말이 아니라 누구나 잘 아는 그 사실을 들어서 무기보다도 더 중요한, 정말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 이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한 말이다. 나라의 이기(利器)는 이 유야(柔弱)의 정신이다. 내노라 하지 않는 정신, 자랑하지 않는 정신, 힘과 돈을 믿지 않는 정신, 억지하지 않는 정신, 결과를 내가 차지하지 않으려는 정신, 전체에 살려는 정신이다. 무기 곳간을 남의 나라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랑함이다. 자랑은 왜 하나? 스스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은 반드시 보다 더 큰 힘을 부르고야 말고, 꾀는 반드시 보다 더 간악한 꾀를 끌어오고야 만다. 이것이 대낮의 해처럼 환한 것이건만,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
열자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도둑이 대낮에 남의 금은 상점에 들어가 모조리 쓸어담다가 잡혔는데, 심문하는 관리가 하두 어이없어 묻기를 “이놈아, 그래 대낮에 남의 것을 그렇게 움킨단 말이냐?” 하니 그놈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도둑질을 할 때 눈에 사람도 아무것도 뵈는 것이 없고, 그저 금은뿐이니 주인을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했다는 것이다. 듣고 웃지 않을 사람이 없지만 남의 나라를 엿보는 소위 정치란 것이 그 도둑 같지 않은 것 없다. 보아도 못 본다. 그것을 보아내는 것이 어짊이다. 微明이다. 나라의 이기인 그 유약의 정신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나,아주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사람인 담엔 누구에게나 다 있는 양심이란 것이다. 양심처럼 약하고 보드라운 것은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가늘고 보드라운 소리”라고 했다.
벌써 입을 겨우 나불거려 말을 시작할 때부터 조금만 제 잘 못한 것이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는 것이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니 세상에 이처럼 가늘고 보드랍고 약한 것이 어디 있나? 그렇지만 그 약한 소리에 못 견디어 그것을 차마 억누르지 못해 십자가에 걸리고 독약 사발을 들이켰으니 어떻게 하나? 이것이 정말 柔勝剛 弱勝强 아닌가? 간디가 비폭력운동으로 인도 독립을 위해 영제국주의와 싸웠을 때 그 흉악한 괴물의 정수리에 치명적인 침을 꽃은 것은 칼이 아니라 “인도를 내놓아라(Quit India)”의 한 마디 말이었다. 때리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사람마다 영국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여기는 당신 있을 곳이 아닙니다” 하고 엄숙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영국 백만대군으로 하여금 칼 하나 총알 하나 쓰지 못하고 그야말로 명예의 퇴군을 하게 했다. 그때 영국군인 말이 “이놈들 차라리 반항을 한다면 무섭지 않겠는데, 이 말에는 정말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힘과 재주로 하지 않고 양심과 참으로 하는 인도 사람에 대해 영국 사람도 양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강한 것은 저보다 더한 강을 불러일으키고 독한 것은 또 저보다 더 지독한 독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착하고 부드러운 것은 또 저와 같은 착하고 부드러운 것을 불러일으킨다. 양심은 제대로 있을 때는 소 밑에 업디어 있는 고기같이 약 한 것이요, 고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유혹도 위협도 이기는 힘이 있다. 가만히 “아니” 한 마디 하면 그만이다. 삼군(三軍)은 가탈사야(可奪師也)어니와 필부지지(匹夫之志)는 불가탈(不可奪)이란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 양심이 가슴 속에 가만있지 않고 입으로 얼굴로 손짓 발짓으로 깃발로 구호로 부산을 떨고 나올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양심을 가만히 품고 있지 않고 내 번뜩이는 것은 벌써 자랑하는 것이요, 자랑하면 벌써 팔린 것이다. 돈과 지위와 공로와 명예를 내세우지 않고 양심을 끄집어내어 번뜩이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애국심이 벌써 길거리에 나와 번쩍거릴 때 그 국민은 힘을 잃은 것이다. 애국심을 물질로 상주려 할 때는 벌써 나라 정신의 곳간엔 도둑이 들어온 때요, 나라의 이기는 벌써 바빌론으로 다 가져간 때다. 양심이 있는 줄 알지도 못하는 때가, 마치 파란 물만 보이고 고기는 보이지 않는 때같이 고기가 싱싱히 살아있는 때요, 국민이 나라 사랑하는 줄 알지도 못하고 각각 제 할 일을 잔잔히 하고 있는 때가 정말 나라가 튼튼한 때다.
국민에게 양심이 생각나도록 건드려서는 아니 되고 돈으로 지위로 영웅심으로 애국심을 자극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만금(萬金)에 신이 나고 높은 자리에 감격했던 애국자 앞에 나라를 망치려는 자가 천만금을 가지고 오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를 주마 약속하며 아니 들으면 가진 것을 다 뺏는다 위협할 때 어찌하겠는가? 이래서 예수가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하라 했고 선을 할 때는 남이 모르게, 남만 아니라 제 바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그것은 곧 갚아주심 바라지 말란 말이다. 갚아주기를 바래서도 못쓰지만, 제가 또 누구의 선을 상 줄 수 있는 것처럼 나라 위한 공로를 능히 제가 나라를 대신해 갚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함석헌 1901~1989, 함석헌전집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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