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차마설(借馬說)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¹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²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₃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원문생략]
-이곡(李穀, 1298~1351 고려문신), 『차마설(借馬說), 가정집(稼亭集) 제7권』-
[주1]만방(萬邦)의 독부(獨夫)가 되고 : 만승(萬乘)의 천자도 포악무도하게 굴면 백성들의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신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독부(獨夫)는 하늘도 버리고 백성도 버려 외롭게 된 통치자라는 뜻인데, 《서경(書經)》 태서 하(泰誓下)에 폭군 주(紂)를 독부로 명명하고 그의 죄악상을 나열한 내용이 나온다.
[주2]고신(孤臣) : 임금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하
[주3]오래도록 …… 알았겠는가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요순은 인의(仁義)의 성품을 타고났고, 탕왕과 무왕은 몸에 익혔고, 춘추 오패는 차용하였다.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堯舜性之也 湯武身之也 五覇假之也 久假而不歸 烏知其非有也〕”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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