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렵다
이 아우의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덕을 헤아리고 지체를 비교하여 모두 벗으로 허여한 터이지요. 그러나 벗으로 허여한 자 중에는 명성을 추구하고 권세에 붙좇는 혐의가 없지 않았으니, 눈에 벗은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은 다만 명성과 이익과 권세였을 따름이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스스로 풀숲 사이로 도피해 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승’이요 ‘아내를 둔 행각승’이라 하겠습니다. 산 높고 물이 깊으니, 명성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지요?
옛사람의 이른바 “걸핏하면 곧 비방을 당하지만, 명성 또한 따라온다.”는 것 또한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 명성 좋아하는 자는 늙어가면 저절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예찬을 잠시 받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얻은 명성이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쌓인 비방은 산더미 같았으니, 매양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면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스스로 깎아내리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더구나 감히 다시 명성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러니 명성을 구하기 위한 벗은 이미 나의 안중에서 떠나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른바 이익과 권세라는 것도 일찍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으나, 대개 사람들이 모두 남의 것을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 생각만 하지 제 것을 덜어내서 남에게 보태주는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성이란 본시 허무한 것이요 사람들이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쉽게 서로 주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익과 실질적인 권세에 이르면 어찌 선뜻 자기 것을 양보해서 남에게 주려 하겠습니까.
그 길로 바삐 달려가는 자들은 흔히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기 마련이니, 한갓 스스로 기름을 가까이 했다가 옷만 더럽힌 셈입니다. 이 역시 이해(利害)를 따지는 비열한 논의라 하겠지만, 사실은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또한 진작 형에게 이런 경계를 받은 바 있어, 이익과 권세의 이 두 길을 피한 지가 하마 10년이나 됩니다.
내가 명성ㆍ이익ㆍ권세를 좇는 이 세 가지 벗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이른바 참다운 벗을 찾아보니 대개 한 사람도 없습디다. 벗 사귀는 도리를 다하고자 할진댄,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정말 과연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종놈이라도 진실로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인 것이니, 이를 들어 생각하면 내 과연 이 세상에서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경서(經書)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빈주(賓主, 손님과 주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가 만나 읍양(揖讓, 예의를 갖추어 사양함, 즉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 대함)하는 대열에 둘 수는 없는 것인즉, 고금을 더듬어 볼 때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래 이런 생각마저 끊어 버렸지만, 매양 덕조(德操, 사마휘(司馬徽))*가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할 적에 아름다운 정취가 유유하였고,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 적에 참다운 즐거움이 애틋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산에 오르고 물에 다다를 적마다 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벗 사이의 교제에 열렬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줄 잘 알지만, 심지어 구봉(九峯, 북경사람으로 홍대용이 벗이기도 한 엄과(嚴果)를 말한다) 등 여러 사람들이 하늘가와 땅 끝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을 거쳐 힘들게도 편지를 부쳐오는 것은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곧 꿈속과 다를 바 없어 실로 진정한 정취는 드물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안에서 한 번 만나 보아 서로 거리낌 없이 회포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 하고 찾아가고 말겠는데, 형도 이런 벗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영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서 끊어 버렸는지요? 지난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 마침 한 가닥의 울적한 마음이 들어 우선 여쭙는 바입니다.
※[역자 주]
1. 덕조(德操): 덕조는 사마휘(司馬徽)의 자이다. 사마휘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로 인재를 잘 알아보았는데, 유비(劉備)에게 제갈량과 방통(龐統)을 천거하였다. 사마휘와 제갈량 등은 양양(襄陽) 현산(峴山)에 사는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존모하여 섬겼다. 제갈량은 방덕공의 집에 갈 때마다 상(牀) 아래에서 절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사마휘는 방덕공의 집에 갔을 때 방덕공이 출타하고 없자, 그 부인에게 빨리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하여 방덕공의 처자들이 분주히 상을 차렸는데, 잠시 뒤 방덕공이 돌아오더니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裴松之註》
2.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 장저와 걸닉(桀溺)은 춘추 시대의 은자이다.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가던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으나 가리켜 주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공자를 비웃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박지원(1737~1805), '홍대용에게 답한 두번째 편지(答洪德保書[第二])',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옮긴이 주: 홍덕보(洪德保)는 담헌(湛軒) 홍대용 (洪大容, 1731~1783) 으로, 덕보는 홍대용의 자(字)다. 담헌 홍대용은 연암선생의 절친한 친구로 연암선생보다 6살 연상이다. 또 연암보다 15년이나 앞서 중국을 기행하였다. 기록으로보아, 두 사람은 각각 40대 전후로 서로 친구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절친 홍대용의 영향으로 연암선생도 인품과 학식을 두루 갖춘 여러 중국 선비들과 벗을 맺어 돈독하게 교유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매개로 하여 국내외의 여러 진실된 참선비들을 알아 보고 참다운 벗, 평생지기를 맺어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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