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곡학아세(曲學阿世) : 유림열전-원고생편

청하왕(淸河王) 유승(劉承)의 태부(太傅) 원고생(轅固生)은 제나라 사람이다. 『시』에(시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제 때 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 면전에서 황생(黃生)과 쟁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때에 황생이 이렇게 말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천명을 받아서 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시해한 것입니다.”


이에 원고생은 이렇게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포학하고 혼미하여 천하의 민심이 모두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에게로 귀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은 천하 민심이 바라는 대로 걸왕과 주왕을 토벌했던 것입니다. 걸왕과 주왕의 백성들은 자기 군주의 부림을 받지 않고 탕왕과 무왕에게 귀순했기 때문에 탕왕과 무왕은 부득이 천자로 즉위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황생은 또 다시 이렇게 반문했다. “모자는 비록 낡아 허름해도 반드시 머리 위에 쓰는 것이고, 신은 비록 새것이라도 반드시 발아래에 신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상하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걸왕과 주왕이 비록 무도했지만 그래도 군주로 윗자리에 있었습니다. 탕왕과 무왕이 비록 성인(聖人)이었어도 신하로 아랫자리에 있었습니다. 대저 군주가 어긋나게 행동하면 신하가 바른말로 그 잘못을 바로잡아 천자를 받들어야 하는데, 도리어 잘못을 트집 잡아 군주를 주살하고, 그 대신 남면하여 왕으로 즉위했던 것은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원고생이 말했다. “만약에 당신의 주장대로 시비를 가린다면 한나라 고조께서 진나라를 대신해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른 것입니까?” 


이에 경제가 말하길 “고기를 먹고 말의 간(말의 간은 독성이 있어 사람이 죽인다고 하여 탕왕와 무왕이 군주를 시해했다는 옳지 못한 것이므로 이를 말의 간으로 비유하여 괜히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하니, 그것은 바로 학자들이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어리석음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며 쟁론을 중지시켰다. 


이후 학자들은 다시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고, 걸왕과 주왕이 시해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 감히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두태후(窦太后)가 평소 『노자(老子)』란 서적을 좋아해, 원고생을 불러 『노자』책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원고생이 대답했다. “이것은 집안의 노비 말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태후가 격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찌 사공(司空: 법관)의 성단서(城旦書: 율서, 유가의 말은 율서에 불과하다는 뜻)가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원고생에게 축사로 들어가 돼지를 찔러 죽이게 했다(옮긴이 주: 선듯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 어려운 두 대목이다. 둔한 소견으로 나름 이해하자면, "네 말이 법이 아니고 네가 재판관도 아닐진대 어찌 법률에 입각하듯 그리 단정할 수 있는가? 라는 의미로, 또 노년의 원고에게 별다른 무기없이 '돼지를 찔러 죽이라'는 것은 곧 '돼지밥으로 던져졌다'는 의미로 헤아려진다). 경제는 태후가 격노하고 원고생이 직언을 올린 것을 죄가 없다고 여기고, 원고생에게 날카로운 병기를 빌려주어 축사에서 돼지를 찌르게 했다. 이에 원고생은 축사로 들어가 단칼로 돼지의 정 가운데 심장을 찔러 쓰러뜨렸다.


태후는 침묵하고 있다가 또다시 죄를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만두었다. 얼마 뒤에 경제는 원고생을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여겨 청하왕 유승의 태부로 임명하였다. 한참 지난 뒤에 원고생은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무제는 즉위한 초기에 원고생을 다시 현량(賢良)으로 등용하여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 때에 아첨하는 여러 유생들이 원고생을 질투하여 이렇게 헐뜯었다. “원고생은 너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에 원고생은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구십여 세였다.


원고생을 불러들일 때, 설읍(薛邑) 출신의 공손홍도 역시 불러서 임용했는데, 그는 원고생을 어려워해서 눈치를 보면서 기웃거렸다. 이에 원고생은 말했다. “공손(公孫) 선생, 바른 학문에 힘쓰며 직언을 올려야지, 올바르지 못한 학설로 세속에 영합하면 안됩니다!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옮긴이 주: 고사성어 '곡학아세'의  출전이 되는 짧은 대목이다. 다른 여러 역사서나 엣글들에 의하면, 공손홍은 중국최초로 작위가 없는 평민출신의 학자로  승상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그 마음씀씀이나 성정(性情)이 그리좋지 않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원고생은 공손홍의 이러한 성향을 미리 꿰뚫어 본 것으로 헤아려진다. 공손홍이 원고생을 어려워하고 눈치를 본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이후부터 제나라에서 『시경』을 강론하는 자들은 모두 원고생의 견해에 의거했다. 제나라 사람으로 『시경』을 연구하여 귀하게 된 자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들이었다.


-사기(史記) 유림열전, 원고생(轅固生)편-,


▲글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원고생 (轅固生) - 김영수 역, 한글 번역문 (사기 :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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