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독서하는 방법(讀書法)

독서의 방법은 마땅히 차례에 따라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두와 문장의 의미 사이에 침잠해서, 붙들어 보존하고 실천하는 실지를 체험한 뒤라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점차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널리 구하고 넓게 취해서 날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운다 해도 또한 배움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했다. “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言)을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보는 자는 말(言)을 아는 자가 아니다.” 이 말이 특별히 맛이 있다.


누가 물었다. “책을 읽어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심을 어떻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근래에 배우는 자 가운데 어떤 부류는 책은 버려두고, 한 마디나 반 구절에서 이치를 깨달으려 든다. 또 한 부류는 내쳐 넘치도록 읽으면서도 귀착할 지점을 모른다. 이는 모두 배움을 아는 자가 아니다. 모름지기 익히 보고 익히 생각해서, 오랜 사이에 저절로 그 도리가 아무 걸림이 없게 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핵심이란 것은 그 속에 절로 있다.”


독서란 비유컨대 집 구경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한 차례 보고도 또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나야 본 것이다.


독서는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의리를 구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돌이켜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한다. 진한(秦漢) 이래로 누구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그저 한결같이 서책 위로 나아가 구하기만 했지 자신에게 나아가 따져 깨달으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도달하지 못했는데 성인이 앞서 하신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은 단지 말만 빌리고,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비로소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인의예지를 설명하려면, 자신이 직접 인(仁)이 무엇이고 의(義)가 무엇이며, 예(禮)와 지(智)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 모름지기 몸소 체득해야만 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읽을 때는 자신이 어떻게 배우고 익혔는지 알아야 한다.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일찍이 어떻게 해야 기뻤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얻게 된다. 만약 그저 단락 따라 풀이나 하며 지나가고, 풀이하는 것으로 그치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세해야 한다. 구절 따라 글자마다 보아야만 한다. 노력이 거칠고, 정밀한 생각에 힘쓰지 않으면서 단지 의심할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면, 의심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서 의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일 뿐이다. 독서는 의심이 없는 것은 의심이 나게 하고, 의심이 있는 것은 의심이 없게 해야 한다. 이에 이르러야만 큰 발전이 있다.


배우려고 책을 읽으려면 모름지기 번거로움을 참고 세밀하게 이해해 나가야 한다. 절대로 마음을 거칠게 먹으면 안 된다. 만약 “꼭 책을 읽어야 해? 지름길이 따로 있는데”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다. 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흡사 몇 겹의 물건으로 속에 든 것을 감싼 것과 같아, 대놓고 살펴볼 방법이 없다. 오늘 한 겹을 벗겨내어 또 한 겹을 살피고, 내일 또 한 겹을 제거해서 또 한 겹을 이해한다. 껍질을 다 벗겨야 살이 보이고, 살을 다 걷어 내면 뼈가 나온다. 뼈를 다 제거하면 그제서야 골수가 나온다. 거친 마음과 큰 기세만 가지고는 얻지 못한다. 


-양응수(楊應秀, 1700~1767), '독서법(讀書法)' 중에서 부분발췌-


▲번역글 출처: 『오직 독서뿐』(정민 저, 김영사, 2013)

☞김영사 기획연재 '책에 미치다-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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