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겠는가?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사사로운 뜻을 주장함이고, 다른 하나는 전부터 먼저 들어앉은 견해가 있는 것이다. 비록 떨쳐 내던지려 해도 또한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고 만다.
글을 볼 때 두 가지 병통이 있다. 성품이 둔한 부류는 이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봐도 생소해서 서두르기만 해서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또 민첩하고 날카로운 부류는 흔히 자세히 보려 들지는 않고, 쉽게 얻어 대충 소홀히 하려는 생각이 많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마음이 공정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와 보니 정말 그렇다. 예를 들어 성인의 경전을 풀이할 때는 한결같이 자기 자신은 두지 않아야 한다. 온전히 마음을 내맡겨 단지 그 도리만을 붙들어 옳고 그름을 스스로 보아야 한다. 그저 문자만 보게 되면 오히려 스스로 옛 습속에 얽매여 점검할 곳을 잃고 만다. 온전히 자기의 사사로운 뜻만 붙들고서 성현의 글을 본다면 어떻게 얻을 수가 있겠는가?
-양응수(楊應秀, 1700~1767), '독서법(讀書法)' 중에서 부분발췌-
▲번역글 출처: 『오직 독서뿐』(정민 저, 김영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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