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문장이 아닌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문장에는 아(雅)와 속(俗)이 없으니 오직 그 사람을 볼 뿐이다. 인품이 고고(高古)하면 그의 문장은 아(雅)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雅)해지고, 인품이 비하(卑下)하면 그의 문장이 비록 속(俗)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더욱 그 누추함만 드러낼 것이다. 고문(古文)에 뜻을 두었더라도 자가(自家, 자기)의 사람됨을 성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의 문장을 성취함도 없을 것이니 노천(老泉은 당송팔대가인 소순 蘇洵의 호다)이 만년(晩年)에 스스로 수립(樹立)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천은 「상여청주서(上余靑州書)」에서 ‘탈연(脫然)하게 남에게서 버림받고서는 버림받은 것이 슬프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분연(紛然)하게 남들에게 선택당해서는 선택당한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저절로 버려지고 선택당하면서도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한결 같았으니, 또한 족히 천하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남몰래 웃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릇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오직 도(道)를 본 사람만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요, 뭇사람들이 자가(自家)의 영향(影響)에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천이 스스로 말하기를 ‘젊었을 때는 공부하지 않다가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읽을 줄 알아 사군자(士君子)들을 따라 교유(交遊)했는데, 나와 같은 반열(班列)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모두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마침내 괜찮을 것이다’라고한 것은 바로 스스로 말한 실재(實在) 기록인데 이 말과 서로 수평을 이루어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노천의 사람됨이 처음에는 뭇사람들과 다름없었는데, 그가 나의 소매(素昧, 견문이 좁고 사리에 어두움)했던 평생이 스물다섯 살 때까지였다는 것과, 독서하며 사군자들을 따라 교유하고 자신과 같은 반열의 사람과 비교하는데 있어서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내가 나를 위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난 날 내가 나를 버린 것을 슬퍼할 만하다고 여겼으니, 어느 겨를에 뭇사람들이 나를 버린 것을 슬퍼했겠는가? 지금 내가 나를 선택한 것을 즐거워할 만하다고 여겼으니, 또한 어찌 족히 뭇사람들이 나를 선택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겠는가? 


이에 내가 나를 위하는데 있어서 남이 나를 버리거나 선택해서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며 더하고 더는 것이 있게 하지 않아서, 또한 족히 천하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남몰래 웃었을 것이니, 그가 크게 분발(奮發)하여 문사(文辭)를 짓고, 우뚝하게 대가(大家)를 이루어 구양수(歐陽脩,북송의 문장가, 당송팔대가)와 증공(曾鞏, 북송의 문장가, 당송팔대가)에 백중(伯仲, 우열을 가릴수 없음)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


-김창희(金昌熙, 1844~1890), '소순(蘇洵)의 글을 읽고 논하다(讀老泉文 二首)중 [其]',  석릉선생문집(石菱先生文集) /석릉집(石菱集) 제 5권 /회소류상편(會所頴上篇)-


번역글 출처: 다음 블로그 '봉블로그'


“책 읽기는 식견을 구하려고 하는 건데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읽고만 있으니 아니 읽은 것만 못하고, 글쓰기는 식견을 드러내려 하는 건데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쓰고만 있으니 아니 쓴 것만 못하다.(석릉집, '회흔영 會欣穎'). 문장은 깨달음을 주로 하여 말이 통달하면 이치가 나타난다. 더러 오래 씹어 터득하기도 하고 더러 대번에 달려가 만나기도 한다. 책을 읽고 잊어버리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뿐이다. 샘물은 더럽고 오래된 것을 씻어내야 활수(活水)가 오는 것과 같다(' 발회흔영(跋會欣穎)/미산집眉山集, 한장석 韓章錫1832~1894). ” -석릉 김창희(金昌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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