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시를 짓는 것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시(詩)는 성조(聲調)의 고하(高下)와 자구(字句)의 공졸(工拙)을 막론하고, 그 시가 묘사하는 경(境)이 참되고[眞] 서술하는 정(情)이 실제적이어야만[實] 천하의 좋은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백과 두보 이후에 백거이․소식․육유(陸游) 등의 시는 그 성조가 반드시 다 수준 높은 것은 아니며 자구도 모두 솜씨좋은 것은 아니나, 참되지 않은 경을 묘사하거나 실제가 아닌 정을 서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읽어 보면 정말로 그 시 속의 장소를 직접 밟아보고 그 시속의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니 모두 천하의 좋은 시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짓는 것은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터럭 하나 하나가 모두 꼭 닮아야만 비로소 그 사람을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터럭 하나라도 닮게 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솜씨있게 채색을 하더라도 그 인물의 신정(神情)과는 동떨어지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그려냈다고할 수 있겠는가?
왕리(王履)는 ‘문장은 마땅히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말머리를 묶는 굴레처럼 해서는 안된다(文章當移易不動, 愼勿與馬首之絡相似).’’라고 말했는데, 바로 나의 뜻이다.”
내가 남쪽으로 석 달간 다녀오며 250여수의 시를 지었는데, 다만 그 곳 산천과 풍토의 기이함, 기후와 계절의 변화, 여행의 감상을 적었을 뿐이요, 구구하게 성조와 자구에신경쓰지는 않았다.
시에서 묘사한 경(境)이 참되고 정(情)이 실제적이라고 감히 자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터럭 하나도 아예 닮지 않은 정도도 아니니, 뒷날의 독자들이 이 시를 통해 남쪽 지방의 대강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남행집(南行集)>이라고 제목을 짓고 이렇게 서문을 쓴다.
**옮긴이 주: 이하곤은 시를 짓는 것을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비유하여 지론을 편다. 논자들은 이 글로써 이하곤의 문학을 포괄한 예술성향을 조선시대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본다. 실제로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분야에서 이하곤이 더 거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하곤을 찾아보면 문학계통은 드물고 미술계통의 관련 논문에서 쉽게 찾아진다. 위의 번역글의 출처도 미술계통, 즉 미학에 관한 학술논문이다.
왕리는 명대의 문인으로 미학을 논한 글(화산도서)에서, "그림이란 물(物)의 형상을 그리지만, 주(主)가 되는 것은 의(意)에 있다. 의(意)가 부족하면 이를 형(形)이 아니라고 해도 가하다. 그럴지라도, 의(意)는 형(形)에 있으니, 형(形)을 버리고 어디서 의(意)를 구할 것인가? 이로써 형(形)을 얻는다는 것은 의(意)가 형(形)에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 형(形)을 잃는 것이 어찌 형(形)만을 잃는 것이겠는가!(화산도서)」라고 말한다.
이보다 앞서 《한비자(韓非子)·외제설 좌상(外諸說 左上)》에도 비슷한 내용을 가진 고사가 나온다. 손님 중에 제(齊)나라 왕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나라 왕이 묻기를: "무엇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개나 닭이 가장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그리는 것이 가장 쉬운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귀신이나 도깨비(鬼魅)가 가장 쉽습니다. 무릇 개와 말은, 사람이 능히 아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앞에 마주치며 살펴봐서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류(類)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어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귀매(鬼魅)는 형(形)이 없어 추상적이라, 눈앞에 마주치는 일이 없으니, 따라서 쉬운 것입니다."라 답하였다. 이하곤이 강조하는 사실성, 즉 "참 모습과 참 뜻"의 문장론 지론과 맥락이 닿아 있다. 사슴을 그려놓고 말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봐도 말은 말이고 사슴은 사슴이 되어야 한다. 예시로 인용한 글들은 이하곤이 논증으로 인용한 왕리의 글을 좀 더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준다.
앞서 허균의 산문(文說) 말미에 소개한 바 있지만, 「산보고문집성서문(刪補古文集成序)」을 보면 이하곤의 지론은 더욱 분명하고 쉽게 다가온다. "좋은 글은 좋은 생각에서 나온다. 머리 속에 든 것이 없고, 가슴으로 느낀 것이 없는데, 현란한 수사만 늘어놓는다고 글이 좋아질 까닭이 없다. 뿌리 없는 가지와 잎새는 금새 마른다.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것은 뿌리가 그만큼 튼튼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나무가 보기 좋은 것은 뿌리 때문이지, 가지와 잎새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도 알찬 내용이 없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지나친 수사는 항상 내용을 간섭하고 방해한다. 지금 글 쓰는 사람의 폐단이 세 가지가 있다. 화려하게 꾸미기를 힘쓰는 자는 옛 사람이 이미 했던 말을 가져다가 뜻은 따르면서 글자를 바꾸어 화려한 수식으로 이를 꾸민다. 이는 썩은 가죽에 무늬를 얹고 마른 백골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오직 뜻을 안에서 운용하고, 문사가 겉으로 창달하며, 법은 옛날에서 취해 오더라도 말은 자기가 만들어, 평탄하여 구차하거나 어렵지 않으며, 우뚝하여 절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 이런 것을 일러 진문장(眞文章)이라 한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남행집서(南行集序)>/ 한국문집총간/두타초(頭陀草) 冊17-
▲원글출처: '澹軒 李夏坤, 산수 애호와 문예 지향의 삶' (윤성훈, 2008)
"아아! 세상에 뜻있는 이가 없어진 지 오래이다. 선비가 뜻을 크게 갖고 옛 성현을 사모하는 것을 보면 원리주의자라고 지목하고, 구태의연한 관습을 배척하는 사람을 보면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하며, 굴레를 씌우고 속박하여 손발을 둘 데가 없게 만든다. 너는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속인(俗人)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속인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였다."(이하곤, '사촌 재정(載靜) 이운곤(李運坤)을 곡(哭)하는 글(哭從弟載靜運坤文)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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