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어떻게 독서를 할 것인가?
지난 가을에 서신 올리고 잘 들어갔는지 소식 몰라 지금껏 탄식하였는데, 초여름 사신의 돌아온 편에 멀리 회답을 주시고 겸하여 송전(松箋)의 아름다운 선물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요사이도 귀체 편안하신지요? 시험 기일이 또 다가오니 연구에 많은 애를 쓰실 터인데, 더욱 새로 얻은 것이 많이 있으십니까?
제(弟)는 상기(喪期)를 마친 몸으로 쇠약한 모습이 이미 나타나니 공명(功名)의 길은 분수에 없는 줄로 알며, 또 다행이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두어 이랑의 박전(薄田)이 있어, 먹고 살 수 있으므로 장차 영달(榮達)의 길을 끊어버리고 힘에 따라 수행(修行)하여, 집안을 편안히 하고 한가한 틈을 타서 옛 교훈대로 노력하며, 대장부의 호웅(豪雄)의 본령(本領)을 갖추기에 마음을 쓸까 합니다. 그렇게 함이 혹 관록을 먹는 것보다 그 낙이 못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용기가 꺾이고 게으름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이 뜻을 이룰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족하(足下)와 같은 분은 재주가 비상하고 나이가 젊으니, 용기를 내어 실행해 나아간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시양(侍養 부모를 모시고 봉양함)의 어려움은 생각할수록 탄식스럽습니다. 어버이는 늙고 집안이 가난함은 옛 사람도 마음 상해했거늘, 자식된 사람의 마음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으로 일생의 방향이 갈라지는 길에서 잘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과거란 잠깐 사이의 일이라, 징험할 값어치가 없는 것인데, 매헌의 빼어난 재주로 어찌 그렇게도 자중(自重)하지 않습니까?
편지의 말씀에 경서문장(經書文章)은 강구(講究)하는 데만 그칠 뿐 행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것을 읽어 보고서 족하가 주의 깊게 탐구하여 학문하는데 방법이 있으며, 구구하게 기송(記誦,외우고 기억함)을 일삼지 아니함을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참다운 경지를 표현해 내며 어구의 사용이 정밀하고 깊기가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시골집에 있을 때에 한두 사람의 마을 수재(秀才)들이 때때로 와서 질문을 하기에 참람되이 두어 마디 낡은 견해를 말한 것이 있었는데, 이제 감히 대가(大家)에게 질정(質正)하오니, 잘 분변하여 가르쳐 주소서. 나머지는 전번 서찰에 있으므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아래의 글들은 매헌에게 주는 독서에 관한 조언의 글로, 이론이 아닌 제자들에게도 가르친바 있는 자기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독서는 물론 기송(記誦)을 귀히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처음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기송을 아니하면 더욱 의거할 곳이 없으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밀하게 외어야[誦]할 것이니, 음독(音讀 한자(漢字)를 음(音)으로 읽는 것)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 비로소 산표(算表 읽는 회수를 나타내는 계산표 서수(書數)라고도 함)를 세우고, 먼저 한 번 읽고 그 다음 한 번 외고 그 다음 한 번 보며, 한 번 보고 나서는 다시 먼저 번의 순서대로 되풀이 하여 총합 30~40번을 읽고 그치며, 매양 한 권이나 혹 반 권을 배웠을 때는 먼저 배운 것도 아울러 또한 읽고 그 다음 외고 그 다음 보되, 각각 3~4번을 반복한 다음에 그친다.
무릇 글을 읽을 때에는 높은 소리로 읽는 것이 좋지 않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딴 데에 돌려도 안되니, 눈이 딴 데에 있으면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도 안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무릇 글을 욀 때에는 착란(錯亂)하지 말아야 하고 중복하지 말아야 하며, 너무 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급하게 하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맛이 짧으며, 너무 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느리면 정신이 해이하고 방탕해져서 생각이 뜬다.
무릇, 글을 볼 때에는 글을 묵송(黙誦 마음속으로 외는 것)하면서 그 뜻을 완색(玩索 이리저리 완미해서 찾는 것)하되, 주석을 참고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갖고 궁구해야 한다. 만약 한갓 보기만 하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익이 없다.
오른편 3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다르나, 마음을 전일히 하여 몸소 궁구해야 함은 동일하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똑바로 앉고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거두어 들으며 수족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며 정신을 모아 글에 집중해야 한다. 쉬지 않고 이대로 하면 의미가 날로 새로워 자연히 무궁한 묘미(妙味)가 쌓여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
무릇 초학(初學)에서 능히 회의(會疑 의심할 줄 아는 것)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의 공통된 병통인 것이다. 그러나 그 병통의 뿌리를 따져 보면 마음이 들뜬 생각에 치달려서 뜻이 글에 전일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억지로 회의하려고 하면 우원(迂遠,실제적이지 않아 직접적으로 도움이 않되는 것, 헛다리짚음)하거나 집체(執滯, 막혀서 오도가도 못함)하거나 천박(淺薄)하거나 조솔(粗率, 경솔하여 봐줄 가치가 없음)해서 진정한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회의하고자 하면 먼저 들뜬 생각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들뜬 생각 역시 억지로 배제할 수는 없다. 억지로 배제하려고 하면 이로 인해 도리어 한 생각을 첨가하여 다만 교란(攪亂)만을 더하게 되는 것이니, 오직 어깨와 등을 세워 곧게 하고[肩背竦直] 의취(意趣)를 진작 발동시켜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들뜬 생각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흩어지게 된다.
무릇 들뜬 생각은 하루아침에 깨끗하게 없어질 수 없으니, 오직 물망(勿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귀히 여겨, 모름지기 맑게 하는 공부를 더할 것이며, 혹 마음과 기운이 불평하여 얽혀서 제거되지 않을 때가 있거든, 바로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의 중심에 집중하여, 신명(神明 허령한 마음의 본체(本體))이 제자리에 돌아가 안정하면, 들뜬 생각이 복종하여 물러갈 것이니, 과연 이 방법을 잘 실천하면, 공부가 점점 무르익고, 효험이 점점 자라나, 다만 학문 식견이 날로 진취될 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하여,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전일하고 정밀하게 되리니, 위로 성현에 달하는 학문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의리(義理)는 무궁한 것이니, 결코 망령되이 스스로 만족히 여겨서는 안된다. 무릇 문자(文字)를 거칠게 통한 자에게는 반드시 의문이란 것이 없다. 그러나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궁구하지 않은 탓이다. 의문이 없는데서 의문이 생기고, 맛이 없는 데서 맛이 생긴 다음에야 능히 독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독서는 결코 의문을 일으키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다만 마음을 평정(平正)하게 갖고 뜻을 전일하게 하여, 읽어오고 읽어가되 의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의문이 생기거든 반복하여 확실하게 참고 연구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의거하지 말고, 혹은 사물에 응할 때에 징험하며, 혹은 유연(悠然)하게 노니는 속에서 구하여, 무릇 다닐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궁구하고 완색(玩索)할 것이니, 이와 같이 계속하면 통하지 못한 것이 적고 설사 통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하여도, 이러한 궁구 탐색을 먼저 하고 뒤에 남에게 물으면 바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득할 수 있다.
무릇 독서에 있어서 실속없이 허세나 부리고, 자음(字音)과 구두(句讀)를 착란하며, 무리하게 자구(字句)를 뽑아내서 이리저리 맞추든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의난(疑難)을 발하며,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딴 데로 돌리고 돌아보지 않으며,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으로 끝나고 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익을 구함에 뜻이 없는 자이니, 더불어 학문할 수 없다.
무릇 성현의 언어를 볼 때에는 옛 사람에게 참고하고 그 이미 이뤄진 자취를 상고하여, 그것을 내 몸에 돌이켜 어떻게 적응(適應)해 나아갈 변통 방법을 구해야 하며, 부러운 생각으로 따르려 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고 절실하게 생각하여 마치 바늘로 몸을 찌르는 것같이 해야 한다. 옛 사람의 독서는 대개 이러한 본령(本領)이 있었으니, 이와 같지 않으면, 모두 거짓 학문이 되는 것이다.
내 일찍이 맹자의 ‘이의역지(以意逆志)’(내 뜻으로 남의 뜻을 생각해 봄)란 네 글자를 가지고 독서의 비결을 삼았다. 옛사람의 지은 글이 다만 의리(義理)나 사공(事功)에 있어서 만이 아니고, 비록 편법(篇法 시(詩) 등을 편으로 만드는 법)과 기두(起頭 문장 등의 첫머리)와 결어(結語 글의 끝맺음) 등의 말단에 속하는 기법(技法)마저도 각각 그 뜻이 담겨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제 나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志]을 맞아 들여서, 융합(融合)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화열(和悅)하여 풀리면 이것은 옛사람의 정신과 견식(見識)이 나의 마음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비유컨대, 뭇구리를 하는 데 있어서 신(神)이 내려서 영(靈)이 몸에 붙으면 무당은 갑자기 환하게 깨달아져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문장 구절과 주석에 의지하거나 묵은 자취를 답습(踏襲)하지 않고, 모든 변화를 자유자재로 처리해 나가게 되면 나도 또한 옛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서한 뒤에야 천교를 체득[奪天巧]할 수 있다.
옛사람이 글을 지은 것은 사람들에게 문장을 수식(修飾)하여 공명(功名)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기송(記誦, 외우고 읽기만 하여 이해하려고 힘쓰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을 비유함) 박람(博覽, 책을 폭넓게 많이 읽음)에 의지하여 명예를 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장을 수식하고 기송ㆍ박람에 의지하려는 자도 또한 조망(躁妄, 사고의 깊이가 얕거나 생각이 없는 것)ㆍ천박한 섭렵(涉獵, 물을 건너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종일 외고 읽어, 눈이 글줄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으로 스스로 만족해하나 사려가 들떠서 입으로만 읽고 마음으로 읽지 않으니, 글 지은 사람의 본뜻에 견주어 볼 때 열 겹 스무 겹의 간격이 막혔으니, 어찌 도에서 더욱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것은 천하의 재주를 쓸모없이 만드는 것이다.
초학자의 독서에 있어서, 누구인들 그 어려운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그 괴롭고 어려운 것을 그대로 두고, 일시 편의를 찾아 구차스럽게 편안히 지내려고 하면, 이것은 마침내 재주를 버리는 것이 될 뿐이다. 만약 어느 정도라도 스스로 굳게 참고 반성하여, 점검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10일 안으로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어, 고난은 점점 사라지고 취미는 날로 새로워져서, 점차 손이 저절로 춤추고 발이 저절로 뛰어짐에 이르게 될 것이매,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인데, 그새 우환과 고난이 잇따라 찾아 들므로, 편안히 앉아 독서할 시간이란 얼마 안되는 것이다. 진실로 일찍이 스스로 깨달아 노력하지 않고, 구차히 그날그날 지내가다가는 결국 재주를 스스로 버리게 되는 것이니, 만년에 빈곤을 당할 때 장차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그대들이 나를 찾아와 강학한 지도 이미 2년이 되었다. 뭇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지는 격이었으니, 자못 부끄럽고 우습도다. 다만 나의 인도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그대들도 참으로 진취할 뜻이 없었다. 종전에 여러 번 자세히 말해 주었지만 하나도 채용되어 시행됨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도 또한 싫어지고 게을러져서 다시 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로서 서글피 생각하는 것은 그대들은 재주는 있어도 뜻을 세움이 없고 용의(用意, 사용하고자하는 목적)가 천박하여, 과거보는 글이나 말단의 일까지도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버린 인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다시 마음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아, 위와 같이 조목조목 들었다.
이것은 나의 평생 동안의 독서에서 이미 시험해 본 경험이라 감히 허망한 큰 소리로 남을 놀래려고 한 것이 아니니, 그대들은 시험삼아 이에 따라 해보라, 한 달 정도 실천해 보아서, 아무런 효험이 없거든 나는 망언의 죄를 달게 받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각각 좋아하는 것을 따를 일이요, 다시는 문자를 가지고 서로 변론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 생각할 지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매헌에게 준 글[與梅軒書]', 담헌서(湛軒書)/외집(外集) 1권/항전척독(杭傳尺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은 (역) ┃ 1974
**[옮긴이 주] 매헌(梅軒)은 홍대용이 중국에 체류할 당시 그의 명망(名望)에 이끌려 직접 찾아와 교류를 나눴던 중국인으로 공생(貢生)인 조욱종(趙煜宗)을 말한다. 공생(貢生)이란 요즘 말로 하면 중국의 관료가 될 인재들이 거치는 엘리트 코스인 국자감에서 과거 시험공부를 하는 소위 국비장학생이다. 생원에서 공생으로 가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나이와 지위, 처지와 환경, 그리고 국경, 인종에 연연치 않고 서로 마음에 가진 뜻을 살펴 이우보인의 교우를 나누는 옛 선인들의 살뜰한 모습을 글을 통해 본다. 두사람이 교류를 나누게 된 과정은 담헌서 외집 7권/연기(燕記)/손용주(孫蓉洲)에 나와 있다. 기송 박람, 조망 섭렵...이 글은 자칫 간과하기 쉬운, 글을 대하고 읽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중요한 요체들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마음이 당기는 달달한, 누군가가 거두절미하여 글의 요체도 글의 철학도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요약한 짧은 글들을 부나비처럼 쫓아 다니는 교양의 시대다.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담헌선생도 애둘러 밝히고 있듯이 그 적용와 융통은 장문의 이 글을 대하고 읽는 사람의 용의(用意), 즉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으로 철저하게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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