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뜻은 추구하되 그 행적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성인(聖人)은 배워서 같아질 수 있는가? 배울 수는 있어도 같아질 수는 없다. 만약에 배워서 모두 꼭 같아지려고 한다면 장차 그 가식(假飾 속마음과 달리 언행을 거짓으로 꾸밈)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는 사람은 성인의 본뜻을 구하지 그 행적에는 얽매이지 않는데, 또 어찌 같아지기를 일삼겠는가.
성인을 건성으로 존모하여 멍청하게 그 행적에만 구애된다면 자지(子之)*도 요순(堯舜)과 같아질 수 있으며, 조조(曹操)도 문왕(文王)과 같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서로 가식으로 이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인(衆人)은 성인과 같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성인으로서 성인을 배우더라도 같아지기를 추구하지 않는 법이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요순을 배웠어도 선양(禪讓 임금의 자리를 지혜로운 이에게 서슴없이 내어줌)은 배우지 않았고, 주공(周公)은 이윤(伊尹)을 배웠어도 임금 내치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성인이 되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맹자(孟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소원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실로 잘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나며 사양하고 받는 절의나 언행(言行)과 기상(氣象)의 측면에서 보면, 실로 서로 같지 않은 점이 분명 있다. 이는 대체로 도(道)라는 원칙에서는 궤를 같이했지만 그 행적에 얽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양웅(揚雄)의 경우에는 그리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서 공자를 배우기를 추구하였다. 아아, 맹자 사후에 공자 배우기를 추구한 사람은 양웅이 그 최초이니, 어찌 실로 뛰어나다고 아니할 수 있으랴. 다만 그는 거만하게 자신을 일러 “공자가 다시 나왔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패려궂다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태현경(太玄經)》은 《주역》을 본받았고 《법언(法言)》은 《논어》를 본받았으니, 성인을 배우는 일환이라면 여기에서 그칠 만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왕망(王莽)*에게 나아가 벼슬까지 함으로써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는 성인의 행적과 같아지기를 추구하였다. 그는 아마 ‘공자께서도 양화(陽貨)를 보셨고 남자(南子)도 만났으며, 공산(公山)*이 부르자 가려고 하셨고 필힐(佛肸)*이 부르자 가려고 하셨으니, 내가 왕망에게 벼슬하는 것을 아마 공자께서도 인정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터이다.(옮긴이 주: 왕망(王莽)은 전한(前漢, 西漢)의 관료로 기원전 1년에 어린 황제인 평제를 독살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신(新)으로 세운 인물이다. 왕망은 왕후의 인척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권력의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위찬탈까지 하였다. 이로써 왕망은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적신(戝臣), 역신(逆臣)으로 불리워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천하의 대의(大義)가 무너졌고 그 자신은 명교(名敎)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이는 학문은 반드시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대의와 권도(權道 그때그때의 형편(形便)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방편을 시의적절하고 융통성있게 다루는 지혜로운 도리)는 성인이 아니면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망이 어찌 공산이나 필힐과 같은 정도의 인물인가. 만일 계씨(季氏)가 왕망이 했던 일을 행하였다면 공자도 결코 노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웅은 서둘러 공자를 본받으려던 나머지, 왕망이 공산이나 필힐보다도 더 패덕(悖德)한 인물임을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이것은 양웅이 이기심에 가려진 폐해로, 성인과 같아지려는 추구가 너무 과했던 결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찍이 “《법언》의 한 글자도 10만 금과 바꾸지 않겠다.”라고 했던 양웅이 어찌 함부로 왕망의 조정에서 벼슬하였겠는가.
활 쏘는 사람이 예(羿, 하나라의 활쏘기 명인)의 사법(射法, 활쏘기)을 배우면서 그와 같아지기를 고집한다면 죽을 때까지 화살 한 발도 쏠 수 없으며, 말 모는 자가 조보(造父, 주나라 사람으로 마술의 명인)의 마술(馬術)을 배우면서 그와 같아지기를 고집한다면 죽을 때까지 한 걸음도 뗄 수 없다. 능력이 없는데 억지로 하다가는 결국 활은 부러지고 바퀴 테는 벗겨지고 말 것이다.
아아, 《태현경》과 《법언》이 비록 참람(僭濫, 분수에 넘치고 지나침)하긴 하였으나, 만약 양웅이 이를 안고 궁핍하게 살았더라면, 역시 공자의 후학이 되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자하게 스스로를 안자(顔子)나 증자(曾子) 이상의 성인에게 비김으로써 본래 양웅의 면모까지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양웅은 실로 망녕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또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는 세상의 유자(儒者,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즉 학문하는 사람)에게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다.
송(宋)나라 때에는 왕통(王通)*을 일러 ‘공문(孔門)의 왕망(王莽)’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는 참람하게도 속경(續經)을 자부했으면서 양견*(楊堅, 위진남북조시대에 북주(北周)의 재상으로 북주의 황실을 폐하고 수나라를 세워 초대 황제에 오른 수 문제(隋文帝)의 이름)과 왕망이 찬탈한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결국 성공한 경우가 양견이고 실패한 경우가 왕망이라는 차이뿐인데, 왕통은 양견에게 〈십이책(十二策)〉을 올려 벼슬을 구했으니, 왕통 역시 공자와 같아지기를 추구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양소(楊素, 수나라의 대신)가 벼슬하기를 권했어도 듣지 않았으니, 양웅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인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공문의 왕망’이라는 지목은 양웅이 첫째로 받아야 하고 왕통이 그다음에 받아야 할 것이다.
※[역자 주]
1. 양웅론(揚雄論) : 정양완은 이 〈양웅론〉의 논지가 “법고(法古)는 하되 모방과 답습은 하지 않고 독창(獨創)과 창신(創新)을 외치는 매천의 문학 정신과 일맥상통한다.”라고 하였다. 《정양완, 散文을 통해서 본 梅泉의 文學精神, 震檀學報 61집, 1986》
2. 자지(子之) : 자지는 전국 시대 연(燕)나라 임금 쾌(噲)의 정승이다. 그런데 쾌가 소대(蘇代)의 계략에 빠져서 자지에게 정권을 넘기고 도리어 그의 신하가 되었던 일이 있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여기에서 “자지도 요순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것은, 바로 그 행적으로만 보면 순(舜)이 요(堯) 임금에게 선양(禪讓)을 받고 우(禹)가 순 임금에게 선양을 받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조조(曹操)도 문왕(文王)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것은, 조조는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르지 않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였는데, 이 행적만 보면 주나라 문왕이 끝까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섬긴 일과 같다는 것이다.
3.양웅(揚雄) : 기원전 53~18. 전한 말기의 학자이며,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자는 자운(子雲)이다.
4. 왕망(王莽) : 기원전 45~25. 한나라 평제(平帝) 때 권력을 잡고 전횡하다가 이후 제위를 찬탈하여 신(新)나라를 세웠다.
5.공산(公山) : 공산은 계씨(季氏)의 가신인 공산불요(公山弗擾)를 말한다. 《논어》 〈양화〉에 보면, 공산불요가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괜히 부르겠는가. 만일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하면서 가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6. 필힐(佛肸): 필힐은 조 간자(趙簡子)의 가신으로 중모(中牟) 땅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가려고 했다는 기록이 《논어》 〈양화〉에 보인다.
7. 왕통(王通) : 584~617. 수(隋)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이고 사시(私諡)는 문중자(文中子)이다. 20세 때 수 문제에게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바쳤다가 채택되지 않자, 하분(河汾)으로 물러나 강학에 힘썼다.
8. 양견(楊堅) : 수 문제(隋文帝)의 이름이다. 그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주(北周)의 어린 임금 정제(靜帝)를 폐하고 제위를 찬탈한 뒤에 국호를 수(隋)라 칭하였고, 후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천하를 통일하였다.
9. 양소(楊素) : 수(隋)나라 때의 대신으로 화음(華陰) 사람이며 자는 처도(處道)이다. 개황(開皇) 10년(590)에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의 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후에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황현(黃玹, 1855 ~1910), '양웅론(揚雄論)', 매천집(梅泉集)제6권/논(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기찬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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