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어떻게 지어야할 것인가?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 옛것을 지키고 본받음)’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의 《주관(周官)》으로 족히 예악을 제정할 수 있고,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창신(刱新 새롭게 창조함)’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 되는 장대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 도량형기(度量衡器)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신성(新聲, 빠른 가락의 시조창가. 요즘으로 치면 랩)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을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苟能法古而知變。刱新而能典 즉 옛 것에 기초하여 배우고 익혀 아는 것을 융통성있게 변화시켜 현재에 적용할 줄 알고, 새로이 창작하면서도 바른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이가 있었으니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요,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이가 있었으니 회음후(淮陰侯)가 바로 그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공명선이 증자(曾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이나 글을 읽지 않기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제가 선생님께서 집에 계실 때나 손님을 응접하실 때나 조정에 계실 때를 보면서 그 처신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불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음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데, 단지 그대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다. 병법에 그러지 않았던가?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살아난다.’고.”
그러므로 무턱대고 배우지는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魯) 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예(禮)에 대해서도 시비가 분분하고 악(樂)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 ‘인(仁)’이라고 이르고 슬기로운 이는 도를 보고 ‘지(智)’라 이른다.
그러므로 백세(百世)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요,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 한 것은 뒷 현인이 그 뜻을 계승한 말씀이다.우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가 그 법도는 한 가지요, 편협함〔隘〕과 공손치 못함〔不恭〕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 법이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 박제가)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이래서 명 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도를 얻지 못한 채 다 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도를 옹호하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지금 《초정집》을 읽고서, 공명선과 노 나라 남자의 독실한 배움을 아울러 논하고, 회음후와 우후(虞詡)의 기이한 발상이 다 옛것을 배워서 잘 변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옮긴이 주: 회음후 부터는 번역이 좀 애매하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을 찾아보니 無不學古之法而善變者也이다. 즉 앞서 비유와 내용을 미루어 의역하면, '옛 학문이 지향하는 핵심을 파악하여 그 본래의 뜻을 훼손치 않고 그것을 기반으로 융통성을 발휘하여 선하게 새롭게 적용한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 밤에 초정(楚亭)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침내 그 책머리에 써서 권면하는 바이다.
문장을 논한 정도(正道)라 하겠다. 사람을 깨우치는 대목이 마치 구리 고리 위에 은빛 별 표시가 있어 안 보고 더듬어도 치수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글에는 두 짝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끊어진 벼랑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긴 강물이 되었다. ‘명 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하나로 의견이 합치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 말은 편언절옥(片言折獄,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림)이라고 이를 만하다(역자주: 이 마지막 단락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 : 1751~1809)이 연암의 글 뒤에 붙인 평어(評語, 평가말)이다.)
※<역자 주>
1. 왕망(王莽)의 《주관(周官)》 : 왕망(기원전 45~기원후 23)은 한(漢) 나라 평제(平帝)를 시해한 뒤 섭황제(攝皇帝)로 자칭하며 섭정(攝政)을 행하다가 결국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 신(新) 나라를 세웠다. 그는 주공(周公)의 선례를 들어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면서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周禮)》에 근거하여 각종 개혁을 시도했으나, 시대착오적인 개혁으로 혼란을 초래하여 민심을 잃고 농민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주관》은 곧 《주례》를 말한다. 왕망이 집권할 때 그에게 아부하기 위해 유흠(劉歆)이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던 《주관》을 개찬(改竄)하고 《주례》로 이름을 고쳐 유가 경전의 하나로 격상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유흠 등은 태후에게 올린 글에서 섭황제인 왕망을 극구 예찬하여 “드디어 비부를 열고 유자들을 모아 예와 악을 제작했으며〔遂開秘府 會群儒 制禮作樂〕”, “《주례》를 발굴하여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의 예를 본받았음을 밝히셨다.〔發得周禮 以明因監〕”고 하였다. 《漢書 卷99 王莽傳上》
2. 혼자살던 노나라의 남자 : 노 나라에 어떤 남자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과부가 밤중에 폭풍우로 집이 무너지자 그를 찾아와 하룻밤 재워 줄 것을 청하니 문을 잠그고 열어 주지 않았다. 과부가 “당신은 어찌하여 유하혜(柳下惠)처럼 하지 않소? 그는 성문이 닫힐 때 미처 들어오지 못한 여자를 몸으로 따뜻하게 녹여 주었으나, 국민들이 그를 음란하다고 하지 않았다오.” 하자, 그는 “유하혜는 그래도 되지만 나는 안 되오. 나는 장차 내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써 유하혜라면 해도 되는 행동을 배우려고 하오.”라고 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유하혜를 배우고자 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흡사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최고의 선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답습하지 않으니,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 칭찬했다 한다. 《詩經 小雅 巷伯 毛傳》 《孔子家語 卷2 好生》
3.우승경(虞升卿) : 손빈(孫臏)이 제(齊)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 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군사들이 겁먹고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보병을 버려둔 채 기병만으로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후한(後漢) 때의 장수 우후(虞詡)는 자가 승경(升卿)으로, 북방의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병력의 열세로 인해 몰리게 되자 구원병이 온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는 아궁이의 수를 매일 늘려 구원병이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묻기를, “손빈은 아궁이의 수를 줄였다는데 그대는 늘리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오?” 하자, “손빈은 허약한 척하느라고 아궁이 수를 줄인 것이고 나는 반대로 강하게 보이려고 아궁이 수를 늘린 것이니, 이는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後漢書 卷88 虞詡列傳》
4. 편협함〔隘〕과 공손치 못함〔不恭〕: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는,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타협하지 않은 백이(伯夷)와 더러운 세태에 아랑곳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을 지켜 간 유하혜(柳下惠)를 예로 들면서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편협함과 공손치 못함은 군자가 따르지 않는다.〔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고 하였다.
5. 명 나라의 여러 작가들 : 명 나라 때 이반룡(李攀龍)ㆍ왕세정(王世貞) 등 이른바 칠자(七子)들은 “산문은 반드시 선진(先秦) 양한(兩漢)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고 하면서 법고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반면, 원굉도(袁宏道) 형제 등 소위 공안파(公安派)들은 “성령을 독자적으로 표현하고 상투적 표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獨抒性靈 不拘格套〕”고 하면서 창신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였다.
-박지원(1737~1805), '초정집서(楚亭集序)' 연암집 제1권/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고전산문 > 연암 박지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벗과 사귐에 대하여 (穢德先生傳 예덕선생전) (0) | 2017.12.19 |
---|---|
한푼 짜리도 못되는 양반(兩班傳 양반전) (0) | 2017.12.19 |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중간에 있다 (0) | 2017.12.19 |
왜 글을 읽는가? (0) | 2017.12.19 |
진짜를 알아 보는 안목 (筆洗說 필세설) (0) | 2017.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