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구이지학(口耳之學) / 유성룡
‘홍범(洪範)’에 말하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예지를 말함(思曰睿)이며, 예지란 성인(聖人)을 만든다(睿作聖).”고 했으니, 엄숙ㆍ조리ㆍ지혜ㆍ도모는 생각하지 않으면 설 수 없다. (옮긴이 주: 睿(예)는 깊고 밝은 예, 슬기 예의 뜻으로, 즉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사려깊게 분별하여 깊은 뜻을 찾아내어 밝히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오행(五行)에서는 토(土)에 속하여,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에 토기(土氣)가 없는 데가 없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어지는 것이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 말하였다.
《중용》의 박학(博學)ㆍ심문(審問)ㆍ신사(愼思)ㆍ명변(明辨)ㆍ독행(篤行) 다섯 가지는 생각이 주가 되기 때문에 그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맹자는, “마음이 맡은 것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현의 학문은 오로지 생각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구이지학(口耳之學)이니, 비록 많다 하더라도 무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5대의 수레의 책을 외는데, 그 뜻을 물으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사(思)라는 글자는 밭 전(田) 밑에 마음 심(心)을 붙인 것이다. 즉, 밭(田)이란 갈아 다스린다는 뜻이니, 사람이 마음의 밭을 잘 갈아 다스리기를 농부가 가라지를 제거하여 좋은 곡식을 기르는 것과 같이 한다면, 마음[心]이 이로 말미암아 발라지고 뜻이 이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니, 악한 생각이 물러가고 천리(天理)가 저절로 밝아진다.
정일(精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 마음이 순수하고 한결같음)의 공부도 이와 같을 뿐이다. 《관자(管子)》에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라. 생각해서 통하지 않는 것은 귀신이 곧 통하게 해 주리니, 이는 귀신의 힘이 아니라 정성의 지극함이다.” 라고 하였다. 이도 글을 읽고 생각을 극진히 하는 법이니, 생각한다는 뜻은 크도다.
※<옮긴이 주>
1.홍범(洪範)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한 편(篇)이다. 홍범은 대법(大法), 즉 천지간에 가장 큰 법이라는 뜻이다.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를 주(周) 나라의 도읍으로 데리고 가서 하늘의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기자가 답한 것이 이 홍범이라고 전해진다.
2. 구이지학(口耳之學):귀로 전해 들은 것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대로 남에게 전하기만 할뿐 조금도 제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얕은 학문을 말한다. 즉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의 천박성을 뚯하는 말로,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이 그 출전이다. “군자의 학문하는 것을 보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면 그것을 마음에 새겨 온몸에 퍼지게 되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한결같아 움직임과 태도 모두가 그대로 법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인의 학문이란 귀로 들으면 곧바로 입으로 토하고 만다. 귀와 입 사이는 불과 4치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7척의 몸인들 아릅답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옛날 학자들은 오직 자기 몸을 닦기 위하여 학문에 힘썼으나 요즘 학자는 자기를 위한 삶의 수단으로 남을 위해 공부한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몸을 훌륭하게 하려는 것인데, 소인의 학문은 자기를 짐승으로 만들뿐이다. 소인은 묻지 않는 일을 남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니 이런 것을 경망스럽다하고 한 가지를 묻는데 두 가지씩 대답함은 말이 많다고 한다. 경망스러운 것도 안되고 말이 많아도 안 되니 군자는 질문을 받으면 메아리와도 같이 바로 응답하되 그 물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순자 勸學)”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고사성어로 ˝도청도설(道廳塗說)˝이 있다.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이 그 출전으로, ˝길에서 들은 풍월을 길에서 되받아 옮기는 것[道聽而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배움은 생각하는 것을 주(主)로 함(學以思爲主)', 서애집(西厓集)/서애선생문집 제15권/잡저(雜著)-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권호기 박희창 은정희 조복연 최순희 (공역) ┃ 1977
"무릇 독서할 적에는 주해(註解)를 먼저 보아서는 안 된다. 우선 경문을 반복해서 상세히 음미하여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뜻을 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 주해를 참고하여 비교한다면, 거의 경(經)의 뜻이 환해져서 다른 해설에 가리지 않는다. 만약 먼저 주해를 본다면 그 주해의 말이 내 마음에 걸려 자기 나름대로는 끝내 새로운 뜻이 없을 것이다." (유성룡,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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