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소인(小人)이 소인됨은 소인 스스로 아는 것 / 김시양

참찬 백인걸(白仁傑)은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간원의 하위 관직, 왕에게 간언하는 간관직책)으로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드디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나무람을 듣게 되자, 감사 최보한(崔輔漢)이 파면시켰다. 그런데 최보한이 일찍이 백인걸에게 탄핵을 당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보복이라고 말하였다. (참고: 참찬은 국정에서 3 정승을 보좌하는  고위 직책이다. 오늘 날의 국무조정실장에 해당하는 장관급

인종(仁宗) 서거 당시 최보한은 국상(國喪) 때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죄를 받고 파면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니, 최보한이 다시 채용되었다. 대간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니, 백인걸이 그때 헌납(사간원의 관직, 정언의 상위직, 대사간-사간-헌납-정언)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최보한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소문에서 나온 말이니,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군자는 너무 심한 처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사람을 태평 시대에 금고(禁錮)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최보한이 드디어 탄핵을 면하였다. (참고: 삼사(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언론을 담당하는 직책을 통털어 '대간' 또는 언관이라 한다)

최보한은 백인걸이 묵은 원한을 마음껏 갚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백인걸이 태연하게 마음에 두지 않으니, 최보한은 매우 고맙게 여겼다. 

밀계(密啓, 공식적인 절차와 검증, 검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남몰래 왕에게 밀고하는 것)로 사화(士禍,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대간 중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백인걸이 맨 먼저 법망에 걸렸으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최보한의 힘이었다. 

참찬 백인걸은 허자(許磁)와 이웃 관계여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허자가 별다른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백인걸에게 나눠주곤 하였는데, 백인걸의 가난을 알았기 때문이다. 

밀계가 처음으로 조정에 내려오니, 인심이 어수선 하였다. 대사헌 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이 원형(元衡, 윤원형, 을사사화의 주범으로 정적인 윤임일파를 밀계로 무고하여 숙청했다)의 사주를 받고 종적이 비밀스러워 아침 저녁도 보전할 수 없었다. 

허자가 백인걸을 초청하여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묻기를,  “내일 대간들이 밀계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인데, 그대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어떻게 하겠는가?(옮긴이 주: 허자는 백인걸의 노모봉양을 빌미로 밀계의 음모에 적극 동참하라고 직설적인 회유를 시도한다)” 하니, 백인걸이 말하기를,  “이미 몸을 임금께 바쳤으니, 어찌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자가 여러 가지 말로 권유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백인걸이 끝내 듣지 않으니, 허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일 그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고 하였다. 백인걸이 작별하고 나가니, 허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일은 그대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는 날이 되겠네.” 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소인이 소인되는 것을 소인 또한 스스로 아는 것이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 '부계기문(涪溪記聞)' 중에서,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75

 ※옮긴이 주: 을사사화 당시 윤원형의 밀계와 사주로 대사헌 민제인이 공개적으로 윤임일파를 제거하고자 공론화하자, 유일하게 사간원의 대간(헌납)인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나서서, 밀계의 부당함을 왕과 관료들 앞에서 직언하고 비판하였다고 갈암 이현일 선생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직언의 내용과 함께, " 당시 백인걸이 부름을 받고 예궐하여 이를 아뢰려고 할 때에 그의 어미와 처에게 고하기를 ‘내가 지금 가면 필시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니 놀라지 말라.’ 하니 어미와 아내가 울면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평하기를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낯빛을 바로하고 직언을 하였으니 여러 간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올바른 사람들의 기상을 씩씩하게 하기에는 넉넉했으니 우주간에 이러한 행동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칭송하였다.  상촌 신흠선생의 상촌잡록에도 '일에 당해서 꺾이지 않은 절개와 지조를 가진 이는 찬성(贊成) 권발(權潑)과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뿐이며, 백인걸은 을사년 화를 치르고 살아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외의 여러 기록들에서도 같은 사실들이 찾아진다. 성리학자이기도 한 백인걸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같은 대학자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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