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사물의 부림을 받지 않으려면 / 조귀명

천하의 근심은 항상 사물(物)에서 그 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구차스럽게 그 족함을 사물에서 애써 구한다면, 만족스럽지 않을 때 눈은 그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고, 마음은 그 때문에 허둥지둥하며, 정신은 그 때문에 쉬이 피로해지고 만다. 내 온몸이 외물의 부림을 당하는 까닭에 족(足) 함에 이르지 않는다면, 근심은 그치지 않기 마련이다. 

또한 내가 접하는 세상 사물(物)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내가 그 족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와 더불어 무궁하다 하겠다. 하나에 만족하더라도 반드시 둘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몸 또한 둘에 부림을 당하여 족함을 구한다. 동쪽에 족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서쪽에 족하지 않는다면, 몸 또한 서쪽에 부림을 당하여 족함을 구한다.

부귀영화와 명성(富貴榮名)과 찬란한 황금 보석들(黃金丹朱)와 크고 웅장한 집의 서까래와 시종을 드는 수백 명의 남녀 노복들과 처첩, 이것은 누구나 세속에서 그 족함을 구하는 바다. 그러나 혹자는 이를 비루하게 여기고, 단순 소박하여 욕심(慾心)이 없고 마음이 깨끗한 것(淡泊)으로 자기 분수로 삼으며,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과 진정성(率易)에 자기를 기약하는 사람이 있다. 비록 칡으로 엮은 옷과 산나물밥일지라도 입고 먹는 것에 그저 만족한다. 그래서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옷(繡)과 기름진 고기와 곡식을 사모하지 않고, 그저 풍월송죽(風月松竹)에도 경취(景趣)가 족하여 녹봉이 나오는 땅(封域)과 명예를 바라지 않으니, 이 어찌 이른바 고상(高尙) 하고 빼어나게 탈연무라(脫然無累)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올빼미는 쥐를 좋아하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지렁이는 아래로는 샘물을 마시며 위로는 흙을 먹고 자라는 것이 천성이다. 이들이 샘물과 흙, 쥐와 뱀을 의지하는 바가 진실로 제각기 다르나, 그 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 족함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지금 저 갈포 옷, 나물밥, 풍월(風月), 송죽(松竹)은 뭇 사물(物) 가운데서 쉽게 충족할 수 있고 또 해(害)도 없는 것이지만, 족하기 때문에 족하다고 여긴다면 만일 부족하게 되면 장차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족하여 즐겁다고 한다면, 부족하여서는 장차 즐겁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저 세속의 족함을 구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옛날의 덕이 지극히 높은 현인들(至人)은 뭇 외물을 대할 때 그 족함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 부족함에도 연연치 않아서 우연히 족하여도 족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우연히 부족하여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아 족함도 없고 부족함도 없었다. 이러할진대 여기에 어찌 낙(樂)과 불낙(不樂)을 따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의 사물(物)이 모두 나를 주장하고 부릴 수 없게 되니, 능히 세속의 것에 초탈하여 연연해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홀로 갔다 홀로 돌아오며, 진정 무엇에든 얽매임이 없게 될 것이다.

천산의 처사(處士)는 당신의 집(堂)을 십족(十足)이라 이름 짓고,  나에게 기(記)를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이로써 기(記)를 작성하고, 이에 우러나오는 열 가지 노래(十詠)를 아울러 덧붙인다. 

1. 무엇으로 내 먹거리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보리죽과 조밥이라. 때론 보리와 조도 없을 때가 있지만, 침을 삼켜도 몸의 기운이 편안해진다네.

2. 무엇으로 내 입맛을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산나물과 물고기라. 설령 나물이 없고 고기가 잡히지 않을지라도, 마음에 담은 의(義)와 도리(道理)는 고기처럼 내 입맛을 기름지게 한다네.

3. 무엇으로 나의 입는 것을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여름엔 삼베요 겨울엔 솜옷이라. 설령 삼베와 솜옷이 없을지라도, 없으면 없는 대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뿐.

4. 무엇으로 나의 거처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시원한 처마와 따뜻한 온돌이라.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받쳐주니, 집이 좁고 작아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네.

5. 무엇으로 나의 흥(興)을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걸쭉한 막걸리와 어설픈 시(詩)라. 어느 때 더욱 진실된 마음이 우러나올까  술도 없고 시도 읊지 않는 때라네.

6. 무엇으로 나의 한가롭고 여유로움(閑)을 일깨워 족하게 하나? 
바둑 두기와 거문고 연주라네. 도연명의 줄 없는 거문고, 산골 노인의 바둑 두기, 특별한 비결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네

7. 무엇으로 나의 취향(趣)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서리 맞은 대나무와 눈 덮인 소나무라. 천산(天山) 물가에 비록 꽃이 피지 않았어도,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가짐이 앞서서 대나무와 소나무에도 풍취에 젖어들게 한다네.

8. 무엇으로 나의 경취(景)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이라네. 청풍이 그치고 명월이 진다할지라도 그저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늘과 땅은 온통 아름답기만 하누나.

9. 무엇으로 나의 담화(談)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산골 노인과 늙은 농부라네. 손님 떠나고 나면 편안히 말을 잊으니, 한 점 세상 일일랑 가슴에 담아 두질 않는다네.

10. 무엇으로 나의 노래(聲)를 일깨우고 족하게 하나?
밭 가는 농부가 부르는 노래와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라. 농부의 노랫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피리 소리는 그 소리들을 품으니, 천상의 가락으로 되돌아와 쓸쓸하고 적막함을 사라지게 한다네.

-조귀명(趙龜命)(1693-1737), '십족당기(十足堂記)', 『동계집(東谿集)』

▲참고: 번역문은, 「동계 조귀명 산문연구」(고려대 국어국문, 2003년 석사논문)을 참조하고, 대부분 표절하여 나름 이해하는 글로 재해석하고 윤색하여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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