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역사 인물의 평가 기준 / 기대승

대답하겠습니다.  천지 사이의 한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으로 만고의 일을 두루 살펴보매 한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자취를 상상하고 전현(前賢, 옛 현인)의 뜻을 추구하여, 높은 난간에 기대고 경침(警枕, 공처럼 둥글게 깍아 만든 나무 베게 )*에서 잠을 깨는 회포를 한번 시원하게 펴 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 선생께서 시장(試場, 시험장)에 책문(策問)을 내시되 특히 "고인(옛 사람)의 은현(隱見, 드러나지 않은 것과 드러난 것)과 지업(志業, 뜻을 세워 그것을 이루고자 한 일)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서 물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소생은 청하건대 그 밝게 물어 주신 질문 가운데 이른바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자취(處心行事之跡)’ 의 뜻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인의 행적을 논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자취뿐입니다. 행(行)에는 깊고 얕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취로 인하여 드러나고, 자취는 같고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인하여 드러납니다. 대체로 마음이란 일신의 주재(主宰)이며 만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행이란 마음이 발한 것이요, 자취는 곧 행이 드러나고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혹 취향을 같이하면서도 자취의 은현(隱見)이 서로 같지 않은 경우는 의당 그 마음에 근원하여 보면 자취의 같지 않은 것이 저절로 같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취의 순(順)과 역(逆)이 같지 않고 마음의 고(故,연고 고, 고의성)와 생(眚, 흐릴 생, 잘못 혹은 과오)*이 서로 다른 경우는 의당 그 자취에 근원하고 마음에 근원하여 보면 자취가 순하거나 역하게 된 원인과 마음이 고(故)하거나 생(眚)하게 된 원인이 각기 귀착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같지 않고 자취가 혹 추향(趨向, 대세에 마음이 쏠리어 따라감)을 달리 해서 혹은 충효(忠孝)의 자취가 있고 혹은 편정(偏正, 바름에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지업(志業)이 다른 것도 또한 원인이 있어 자취가 거기에 붙여진 것으로, 행(行)이 드러나는 것과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충분히 헤아려 분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음으로 말하면 사람의 행이 드러난 것이고 자취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니, 어찌 마음이 자취의 바탕이 되고 행(行)이 마음의 화응(和應)을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으로 밝으신 물음의 의혹을 절충하고 나아가서 전현들이 논한 말로 증거를 댄다면, 밝으신 물음에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은 무어 의심할 게 있겠습니까. 밝으신 물음에서 언급한 일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자방(子房 장량(張良) )은 5세(世) 동안 한(韓)나라에서 상신(相臣)을 지낸 가문의 후예로서, 한나라가 망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秦始皇)에게 철퇴를 던졌습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하비(下邳) 고을에 잠복해 있으면서 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참다운 임금(유방, 한 고조(漢高祖) )을 만나 기회를 타서 계책을 결단하여 진나라를 섬멸하고 항우(項羽)를 죽이고 한 고조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원량(元亮 도잠(陶潛) )도 대대로 진(晉)나라의 왕실을 보필한 가문에서 태어나 다시 새 왕조에 몸 굽히기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기노(寄奴 유유(劉裕) )가 한창 탐욕을 부리던 때를 당하여 팽택 영(彭澤令)의 인끈을 내던지고 돌아와 버림으로써 일에 따라 순응하여 진나라의 징사(徵士, 덕과 지혜가 높은 은자로, 왕의 초빙을 받고도 벼슬를 거부한 이들을 가리킴 )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세상에 나가서 중요한 모신(謀臣)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은거하여 비좁은 오막살이에 처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다른데도 고인(古人)을 논하는 자들이 그들을 서로 비교하여 똑같이 보는 것은 그 마음에 근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신(韓信)은 맨 으뜸으로 큰 계책을 세워 패공(沛公 한 고조 유방)을 위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끝내는 실직(失職)으로 말미암아 앙앙불락(怏怏不樂, 야속하게 여기거나 마음에 차지 않아 불만스러워 즐거워하지 못함)하다가 마침내 패역죄에 걸려 살육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욱(荀彧)*은 능히 깊은 계책을 결단하여 조조(曹操)를 도와 패업(霸業)을 이룩하였으나, 끝내 구석(九錫, 황제가 내리는 9가지 귀한 선물)을 받지 말라고 권한 일로 드디어 조조의 뜻을 거슬러 약을 마시고 한(漢)나라에 순절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거역하여 반도(叛徒, 반역의 무리)가 되기도 하고 혹은 순종하여 절사(節士, 절개를 지킨 사람)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어긋나는데도 고정(考亭 주희 )이 한신을 용서하고 순욱을 거절한 것은 곧 그 마음의 고(故, 연고 고)와 생(眚, 흐릴 생)*에 근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옮긴이 주: "그 마음의 고(故)와 생(眚), 서두에 전제한 결론에 대입하면 (故는 '마음가짐'이고, (眚)은 그에 따라 '일을 행한 자취'다.  쉽게 풀이하자면, '그 인물들의 평소 마음가짐 혹은 마음씀씀이와 그 결과로 비롯된 잘못 혹은 과오' 에 해당된다. 즉, 인물의 실제 행적을 살펴서 과오나 실패의 결과가 어떠한 마음의 바탕에서 나왔는 가를 헤아림으로써 그 평가가 갈린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후 이어지는  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위원(偉元, 왕부)은 자기 아버지 왕의(王儀)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통분하고 원망하여 조정에서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고 앉을 적에도 서쪽을 향해 앉지 않으면서 그 아버지를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혜소(嵆紹)는 불공대천의 원수를 잊고 사마주(司馬主)를 따라 탕음(蕩陰)의 전장(戰場)에 수행했다가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효도를 하기도 하고 혹은 충성을 하기도 하여 마음과 자취가 각기 다른데,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이겠습니까.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경략(景略 왕맹(王猛) )은 권모술수를 써서 오랑캐 임금에게 벼슬을 하여 이웃 나라들을 차차로 침략하였고, 중국을 향해 호랑이처럼 덤벼들어 갑자기 중국 한가운데 자리를 잡음으로써 거의 패업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패하여 성공의 단서를 열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능히 강국을 이룩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나는데도 이를 논하는 자들이 무후(武侯 제갈량 )만을 존숭하고 왕맹은 배척하여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은 곧 그 마음에 편정(偏正, 치우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사람의 마음가짐이 같지 않음에 따라 그 자취 또한 각기 달라지는 것입니다. 은현(隱見)과 역순(逆順)과 지(志)와 업(業)은 오직 그 행하는 바가 서로 타당함을 달리한 것일 뿐인데, 행(行)에는 깊고 얕은 것이 있고 자취에는 같고 다른 것이 있으니, 진실로 능히 그 마음을 가져서 그 자취를 변석(옳고 그름을 따져서 분별하고 이치를 분명하게 해석함)하고 그 자취를 변석하여 그 마음을 밝힌다면 그 같고 다름과 우월하고 졸렬함과 주거나 빼앗는 등의 뜻이 반드시 귀착되는 곳이 있어 백대의 공론을 없애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내가 그들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는 그들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들의 자취에 구애되지 않아서 그들의 참뜻을 얻어 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선 이상 거론한 몇 사람의 일을 가지고 논해 보겠습니다. 장량은 본디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제(高帝 한 고조 )를 따라 자기의 뜻을 달성하였습니다. 비록 횡양군(橫陽君)의 목숨은 연장되지 않았고 마읍(馬邑)의 도읍지는 이미 빈 터가 되어 버렸지만, 자신이 한나라를 위하던 뜻은 지도(軹道)에서 진왕 자영(秦王子嬰)이 목에 끈을 매게 하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몹시 추박(追迫)한 일에서 거의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에 들어간 이후로는 인간 세속의 일을 떨쳐 버리고 도인(導引,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일)과 벽곡(辟穀, 곡식을 익혀먹지 않고 솔잎, 나무 열매 등을 자연 그대로 생식하는 것)을 하면서 저 팔방의 끝, 구천의 밖에 뜻을 의탁하며 형화(形化)와 시해(尸解) 등의 술수나 논하면서 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으니, 그 뜻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도잠(도연명)은 뜻이 높고 식견이 원대하며 시속을 즐겨 따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종사(宗社)가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고 신민(臣民)이 곤궁한 때를 만나 권신(權臣)이 왕명을 제멋대로 거역하여 형세가 장차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날 판이었으니, 비록 한 고조 같은 이를 얻어 그를 따르려고 해도 그때는 영웅호걸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끝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은거하여 호미를 메고 밭에 나가 김을 매는 것으로 악한 자를 미워하는 뜻을 부쳤고, 자신의 성정을 펴서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불평스러운 기분을 해소하면서 자신의 천진(天眞)을 즐겼으니 그의 절의가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의 두 사람은 비록 자취가 혹은 드러났고 혹은 숨었다 하겠으나 마음은 일찍이 숨거나 드러나는 그런 한계 밖에 초연한 것으로, 그 높은 풍도와 아름다운 운치는 천 년 전의 장량이나 천 년 후의 도잠이 똑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자방(子房)은 끝내 세상에 나가 크게 뜻을 폈지만, 연명(淵明 도잠 )이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의귀(依歸)할 만한 영웅호걸이 없었기 때문이니,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보면 다 그렇게 했을 것으로 서로의 마음이 똑같은 것입니다.

한신은 간악한 참소의 구설에 곤경을 당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사심(邪心)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속임수가 난무하고 질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의 실정을 묻지 않고 그의 정상을 살피지 않은 채 서로 원한 가진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단을 내려 그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한(漢)나라가 형벌을 잘못 쓴 것입니다.

순욱은 권모술수를 가지고서 도적의 권세를 빌렸습니다. 몸은 한나라 신하이면서 마음은 조조에게 바쳐 스스로 위국(魏國)의 원훈(元勳)이 되려고 하였습니다만, 동소(董昭)가 먼저 그의 계략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 충언을 하였으나 조조가 기뻐하지 않자 그때는 다시 계책을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한나라에 몸을 바쳐 순절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을 속여 후세의 명예를 보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 씀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한신이 반신(叛臣) 같기는 하지만 그 일은 애매모호하고 그 정상은 어떤 환란에 의해 범하게 된 과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한나라의 과도한 형벌까지 뒤따랐으니 용서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문약(文若 순욱 )이 비록 어진 사람인 듯하나 그 일은 은밀하고 그 마음은 흉험하였으며 죽음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여 엄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부(王裒)는 천륜을 지극히 중하게 생각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통분하게 여긴 나머지 감히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후진을 교육하기만 하였으니, 효도를 충분히 한 것입니다. 혜소(嵇紹)는 정상(情狀)을 용서하여 우생(友生)의 말을 받아들인 끝에 벼슬에 나아가 전일에 있었던 임금에 대한 원한을 풀었으며, 끝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하였으니 충절(忠節)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비록 충과 효를 본디 두 가지로 볼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실천이 어버이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것이고 보면 어버이를 잊고 원한을 풀어 버리는 것은 진실로 원수를 통분하게 여겨 효성을 다한 왕부만은 못한 것입니다. 다만 혜소가 후일에 충성을 다하여 살신성인한 것만은 또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 이에 반해 왕맹은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힌 데 대한 수치심도 없고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상서롭지 못한 일도 잊은 채 구구하게 오랑캐들 틈에 끼어 벼슬하면서 자신의 권모술수를 폈으니, 경략(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림)의 마음가짐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비록 제갈공명은 겨우 한쪽 구석을 보존하였을 뿐이고 왕맹은 재빠르게 중원을 차지했을지라도 그 의로운 기절과 훌륭한 명성은 결코 같은 등급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경략이 거의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수(奇數)의 변천을 잘 포착하였고 당시 영걸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영웅이 없어 그런 하찮은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된 것을 저는 일찍이 완 보병(阮步兵)의 말에서 몹시 한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성패를 가지고 인품을 논하지 않는 뜻이요, 또한 《춘추(春秋)》에서 융적(戎狄, 오랑캐)을 제재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말한다면 사군자(士君子)가 이 세상에 처하는 의리는 반드시 그 도리가 있을 것이고, 사람을 논하는 데는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세상에 처하는 도리라고 하는가 하면, 아무리 곤궁해도 의(義)를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道)를 떠나지 않아서 쓰이고 버림받음을 시속에 따르지 않으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타당한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람을 논하는 뜻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마음에 근원하고 자취에 근원하여 그 역순(逆順, 순리를 거스림)과 편정(偏正, 치우침)의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시비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 자취로써 마음을 근원하여 그 실상을 변석하고 마음으로써 자취를 자세히 조사하여 그 기변(機變)에 통달한다면 고인의 은현(隱見)과 지업(志業)의 다른 점, 처심(處心)과 행사(行事)의 자취에 대해서 말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요, 선철(先哲)들의 논의에 대해서도 그 사이에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집사의 물으신 뜻을 반복하여 익히 살핀 끝에 그 대강을 이상에서 진술하였습니다.

편의 끝에 또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가 훌륭한 재능을 품고서 혼자 스스로 격앙하고 있으니, 누군들 자신이 직설(稷契)과 같이 되어서 전인(前人)들을 낮게 보아 같은 등급으로 치지 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업(功業)이 형세를 달리하고 현사(賢邪)가 추향을 각기 달리함으로써 후인들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정(正, 올바름)으로 내 마음을 함양하지 못하고 한갓 행사의 말단에만 구구하게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사나워서 한신과 같은 패역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흉험하여 순욱과 같은 간인이 되기도 하며, 혹은 권모술수를 써서 왕맹과 같은 편벽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자방ㆍ원량ㆍ위원ㆍ혜소ㆍ공명만 한 이라도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고, 은현과 지업에 있어서 허물이 없지 않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앞에 논했던 몇 사람을 본받아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반드시 뒤에 논했던 몇 사람을 경계 삼아 혹시라도 그와 같이 될까 염려한다면, 필시 세상에 나가거나 은거하는 것이 사리에 타당하게 되어 세도(世道)가 또한 비루한 데로 치닫지 않으리라는 것을 취하는 바입니다. 저는 대체로 일찍이 서사(書史, 역사서)를 토론하며 마음속으로 그 시비를 헤아리고서 한 시대에 잘 적용되기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道)를 밝히고 공(功, 공로, 공적)을 따지지 않으며, 의리를 밝히고 이익을 꾀하지 않는다.〔明其道 不計其功 正其誼 不謀其利〕”는 말을 은현(隱見)의 용(用, 적용의 기준)으로 삼고,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옳은 길로 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낸다.〔得志與民由之 不得志修身見於世〕”는 말을 지업(志業)의 실상(실제 모양이나 상태, 즉 실제로 이루어진 일)으로 삼고 있으니, 오직 집사께서는 저의 논을 크게 칭찬하시어 뒤에 논하는 이들로 하여금 오늘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지 말아 주신다면 후학으로서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답합니다.

※[역자 주] 
1. 경침(警枕) :  나무를 공처럼 둥글게 깎아 만든 베개를 말한다. 약간 잠이 들기만 하면 그 목침이 머리에서 빠져나가 바로 깨도록 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이 이 경침을 사용하면서 독서하였다고 한다. 《范太史集 卷36 司馬溫公布衾銘記》
2. 고(故)와 생(眚) :  고는 고의적인 것을 뜻하고, 생은 어쩌다 실수로 과오를 범하는 것을 뜻한다.
3. 순욱(荀彧): 순욱은 후한 헌제(獻帝) 때 조조(曹操) 밑에서 벼슬하여 분무사마(奮武司馬)에 이르렀는데, 뒤에 동소(董昭) 등의 대신(大臣)이 조조가 난리를 평정한 공이 많다는 이유로 구석(九錫)을 하사하고 국공(國公)에 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조가 이 일에 대해 순욱에게 은밀히 물었는데, 순욱이 충의의 도리에 입각하여 그러한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조조가 불쾌하게 여겼다. 그 뒤에 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했을 때 순욱은 병으로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 《三國志 卷10 魏書10 荀彧 裴注》 그러나 《후한서》 권70〈순욱열전(荀彧列傳)〉에는 순욱이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도인(導引)과 벽곡(辟穀) :  모두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도인은 몸과 수족을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고, 벽곡은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것이다.
5. 형화(形化)와 시해(尸解) :  모두 도가의 신선술로, 형화는 형체가 변화한다는 뜻이고, 시해는 몸만 남겨 놓고 혼백이 빠져 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두 신선으로 화함을 말한다.
6. 직설(稷契) :  순(舜) 임금 때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과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명신(名臣)의 대명사이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실제(失題)', 고봉전서(高峯全書)/고봉속집 제2권 / 책(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7

"듣기로는, 사건에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적(跡, 발자취 적, 자취, 흔적)이고, 분변할 수 있는 것은 실(實, 열매 실, 실상)이다.  때문에 그 사건을 논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 자취(跡)에서가 아니라, 그 실상(實)에 기인해야만 한다.… 천하의 일들은 자취도 있고 실상(實)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취(跡)로써 말을 하자면 진실로 의심할 수 있지만, 실제로 드러난 사실의 실상(實)으로 구한다면 또한 분변하기 어려운 것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혹 자취(跡)도 실상(實)도 없을 수 있고, 자취(跡)도 실상(實)도 모두 있을 수 있다. 그 실상(實)을 잘 관찰한다면 자취(跡)의 유무는 분별할 수 있다. 혹 자취(跡)사 틀렸으나 실상(實)은 맞는 경우가 있고 또한 자취(跡)는 옳지만 그 실상(實)이 틀린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실상(實)을 밝힐 수만 있다면, 자취(跡)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즉 그 실상(實)의 진위 유무를 알아야 그 자취(跡)의 진위유무를 아는 것이고, 그 실상(實)의 옳고 그름을 알아야 그 자취(跡)의 옳고 그름도 비로소 보이게 될 것이다. 자취(跡)는 일찍이 그 실상(實)에서 기인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실상(實)이 없고 자취(跡)만이 있는 경우와 실상(實)은 있는데 자취(跡)가 없는 경우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어찌 실상(實)은 옳으나 그 자취(跡)가 다르고  틀린 경우와 실상(實)이 그른데 자취(跡)가 옳고 맞는 경우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구사맹 具思孟,1531~1604, 팔곡집 외집)

"옛사람이 말하기를, '면상(面相)이 배상(背相)만 못하고 배상이 심상(心相)만 못하다.' 하였으나 내가 생각하건대, 심상(心相)은 오히려 미진한 데가 있으므로 '심상이 행사(行事)의 상(相)만 못하다.'라고 하겠다. 면상(面相)의 길흉은 마침내는 행사에 나타나고, 배상의 길흉도 행사에 나타나고, 심상의 길흉도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니, 행사를 버리고서 사람의 상(相)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은 곧 마감하지 않은 문기(文記)와 같은 것이다.... 면상(面相)과 배상(背相), 심상((心相)은 모두 행사의 상에서 참고하여 검증할 수 있다. 면상에는 근거를 댈 수 있는 단서가 있고, 배상에는 바로잡아 밝히는 단서가 있고, 심상에는 지향하는 실제가 있으니, 모두 쓸 만한 상이 된다. 행사에서 참고하여 검증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방구석에서 세상사를 안배하는 것과 같다."  (최한기 崔漢綺, 1803~1877),인정(人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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