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살아가는 모습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記)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號)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ㆍ개구리ㆍ풀ㆍ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간곡하게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 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영(劉伶)과 같고 /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묻기를, “어른께서는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기(記)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동자(童子) 때부터 그는 나의 집에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하고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어,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기(記)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낙서의 기(記)는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8일경)에 동쪽 이웃 마을로부터 걸어가서 연암 어른을 방문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끼고 숲속의 달은 희끄무레했다. 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시작할 때에는 우레처럼 은은(殷殷)하더니, 끝날 때에는 물거품이 막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어른이 집에 계시려나 생각하며 골목에 들어서서 먼저 들창을 엿보았더니 등불이 비쳤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섰더니, 어른은 식사를 못한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셨다. 바야흐로 버선도 신지 않고 망건도 쓰지 않은 채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옷을 갖추어 입고 앉아서, 고금의 치란(治亂) 및 당세의 문장과 명론(名論)의 파별(派別)ㆍ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시므로, 나는 듣고서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밤은 하마 삼경이 지났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 빛은 갑자기 밝아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고, 은하수는 하얗게 뻗쳐 더욱 가볍게 흔들리며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저것이 어째서 그러는 거지요?” 했더니, 어른은 빙그레 웃으시며, “자네는 그 곁을 한번 보게나.”하셨다. 


대개 촛불이 꺼지려 하면서 불꽃이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에 본 것은 이것과 서로 어리비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잠깐 사이에 촛불이 다 되어, 마침내 둘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어른께서 저와 한마을에 사실 적에 눈 내리는 밤에 어른을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어른께서는 저를 위해 손수 술을 데우셨고, 저 또한 떡을 손으로 집고 질화로에서 구웠는데, 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손이 몹시 뜨거운 바람에 떡을 잿속에 자주 떨어뜨리곤 하여, 서로 쳐다보며 몹시 즐거워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몇 년 사이에 어른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되시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돋았습니다.” 하고는, 한참 동안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기(記)가 완성되었다.


**[역자 주]

1. 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ㆍ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2. 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郡)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3.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4.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5.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6. 장괴애(張乖崖):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蜀)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박지원,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연암집 제3권/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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