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아는 만큼 보인다 / 유한준

그림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아끼는 사람, 보는 사람, 소장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의 그림을 부엌에 걸거나, 왕애(王涯)의 그림을 벽에다 꾸미는 것은 오직 소장한 것일 뿐, 단지 소장한 것만으로는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설령 본다 해도 어린애가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을 보며 입을 벌리고 흐뭇해 하지만, 붉고 푸른 색깔 외에 다른 것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아끼고 사랑할 수가 없다. 설령 사랑하고 아낀다 해도 오직 붓과 종이의 색깔만 가지고 취하는 사람, 또는 그림의 형상과 배치만 가지고 구하는 사람은 능히 그 그림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외형이나 법도 같은 것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오묘한 이치와 아득한 조화 속에서 마음으로 그림을 만난다. 그런 까닭에 그림을 감상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소장하거나 바라보거나 아끼는 세 부류의 껍데기에 있지 않다.

오직 알아봄에 있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보이게 되면 마땅히 이를 소장하게 된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이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김광국(金光國)의 자는 원빈(元賓)이다.  그림을 알아보는 데 기가 막히도록 탁월했다. 김광국은 형태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정신으로 그림을 보았다. 천하의 좋아할 만한 물건을 통 털어 김광국이 아낄 것이 없었다. 그림을 아끼는 마음이 돌아보는 것에 더욱 깊어져서, 쌓이고 쌓인 것이 저처럼 많았다. 그가 그림 폭을 펼쳐 그림을 논평하는 것을 보노라면, 그 논의는 고아함과 속됨, 높고 낮음, 기이함과 바름, 죽음과 삶을 흑백과 같이 나누니, 진실로 깊이 그림을 아는 자가 아니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알아 본 그림은 전부다 단지 소장만 하는 그림이 결코 아니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자고로 그림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많기때문에, 단지 그림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김광국을 판단하기에 부족하다. 김광국은 박식하고, 풍류와 운취가 깊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술에 취하면 고금의 득실과, 누가 좋고 누가 그른지에 논하고 밝게 하여 천고의 기운을 쓸어 비웠다. 어려서는 김광수(金光遂), 이인상(李麟祥)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과 함께 놀았다. 지금의 김광국은 옛것을 좋아하다가 이제는 시들어 흰머리가 되었다. 그의 사람됨은 처음 그와 서로 교류한 이후로 얻게 된 것이다.

김광국이 내게 그림의 발문을 요구했다. 나는 그림을 아는 자가 아니다. 다만 그 일이 위와 같이 있었음을 말하고 그 사람됨을 논하여 발문을 썼다.  이를 통해 나를 김광국에게 보였는데, 좋아하는 바를 오로지 그림으로만 하지 않았다. 김광국은 본관이 경주(慶州), 호는 석농(石農)이다.

-유한준(兪漢雋, 1732∼1811), "김광국의 석농화원(石農畵苑) 발문" , 저암집(著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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