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도(道)와 문(文)은 구별해야 한다 / 유한준

사마천․반고(사마천은 사기, 반고는 한서, 즉  공통점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의 학문이 정자․주자(정희와 주희,유교에서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만 못한 것은 어린애도 알고 있습니다.  학문으로 따지자면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의당 지극하지 못해야 마땅할 듯하지만, 문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정자․주자의 윗 자리에 있습니다. 정자․주자는 심오한 경지에 이른 자신들의 학문을 가지고도 문장에 있어서 만큼은, 사마천․반고의 아래 자리로 밀려나온 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만일 정자․주자의 문장이 사마천․반고의 문장만 못하다고 여겨 그들의 도(道)가 지극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한다면, 천하에 그러한 이치란 없습니다.  만약 사마천․반고의 문장이 도(道)에서 이탈한 것이라 생각하여 문장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어린애 조차도 속일 수 없는 말입니다. 설령 잘 모르겠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하기가 애매하다고 해서, 아예 도(道, 학문)과 문장(文章)을 합하여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까? 도(道)와 문장(文章)은 각기 고유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이또한 진실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것(道學者)과 문장을 하는 것(文學者)은, 같은 차원에서 서로 수용하여 논할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만일 “그들 각자가 스스로 자기의 도(道)를 도(道)로 삼아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道)를 수양함으로써  이때문에 문(文)이 지극하게 향상되었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천하에서 말하는바 도(道)는 변함없이 한결같고 떳떳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는 도(道)의 수양의 여부에 따라 문이 지극하게 향상하였다함은, 도가 처음과 나중이 다를 정도로 뭔가 변했다는 의미가 되므로 결국 '변하지 않는 도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논리라면 굳이 정자와 주자를 기필하지 않아도 도(道)로 인하여 문장이 저절로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도와 문이 분리되면 모두 어그러진 것이 되고, 도와 문이 하나로 합해지면 모두 아름답게 된다면, 어찌 정자와 주자의 도(道)로써 근본을 삼고 사마천과 반고의 문(文)으로써 덮개를 삼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문(文)이 무엇 때문에 삼대 상하의 구별이 있습니까? 번(繁, 번성할 번, 여기에선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묘사함을 뜻함)과 간(簡, 간략할 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삼대 이후에 세상은 변하여 서로 죽이고 치고 박고 다투고 빼앗는 가운데 깨지고 부서지고 이지러지고 찢어져 버렸습니다. 이때문에 거짓말과 위선으로 서로 속이고 속는 세상에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그들을 요․순․우 삼대의 정밀하게 축약된 간략한 말씀으로써 인도하고자 한다면, 이는 마치 향음주례(잔치와 의례의식)를 가지고서 군대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사마천과 반고에게 정자와 주자의 도(道)로써 덧씌울 수 없는 것은, 마치 정자와 주자에게 사마천과 반고의 문(文)으로써  덧씌울  없는 것과 같습니다(※옮긴이 주: 사마천과 반고의 문학성이 정주의 도학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처럼 정주의 학문과 철학성이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 그런즉 어찌 문(文)과 도(道)를 동일시하여 하나로 아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예(禮)로써 인정(人情)을 절제하고 악(樂)으로써 인성(人性)을 다스립니다. 성인께서 예와 악을 가지고 인민들을 다스림에 어찌 고금(과거와 현재)에 따라 달리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삼왕(三王)이 각기 예를 달리하고 오재(五帝)가 악(樂)을 한가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인성(人性)은 서로 멀어지는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기때문에 세속의 풍습에 어찌 이것 저것 가릴 것이 어디 있겠으며, 풍습에 어찌 가깝고 먼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천리(千里)가 풍습을 한가지로 하지 않고 백리(百里)가 속습을 한가지로 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의적절하게 운용하였기때문입니다. 이렇듯 삼대 이후에 이르러 세상이 변한 까닭에 문(文)이 도(道)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이 또한 어찌 괴이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할지라도 족하께서 문장에서 문(文)과 도(道)가 이합(離合, 분리와 합침)하는 문제를 가지고 먼저 제게 가르침을 보이셨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제 견해로는 문(文)과 도(道)가 서로 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견해는 한 때의 구변(口辯)을 상쾌하게 하는데 힘써 부화(浮華, 실속없이 겉만 화려함)를 숭상하고 본실(本實)을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족하께서는 이점을 부디 헤아려주시고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자전(自傳)" 부분, 저암집(著庵集)-

※[옮긴이 주]
위의 글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근재 박윤원(朴胤源:1734∼1799)선생이 주장하는 이른바 문장은 '도학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저암 유한준 선생이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글이다. 쉽게 말해 문학이든 학문이든 도(道, 도리)에 어긋나는 글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곧 '도문일치론'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도(道)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을 따르는 것(중용 1장)"을 일컬는다. 즉 인간답게 참되게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길 내지 방법, 더 나아가 그 길과 방법을 제시하는 소위 윤리 도덕적인 모든 철학적 논의를 포괄한다.

문장에 관한 이러한 인식은 당송팔대가인 한유로부터 비롯되어 정이와 주희에 의해 성리학에서 도통론을 바탕으로 한 문장론의 주류로 확립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저암 유한준 선생은, 사마천과 반고의 문학성과 정이와 주희의 학문성을 예로 들어 도와 문은 구분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역사서는 공히 문학적으로 훌륭한 문장으로 평가된다. 저암 유한준 선생의 주장은, 한마디로 무게를 계량하는 저울로 사물의 길이와 폭과 깊이와 넓이를 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도(道)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道)와 문(文)을 동일시하여 도(道)를 문(文)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고, 아울러 문(文)을 도(道)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되겠다. 다시말해 문장 혹은 문학은 도덕의 틀로 제한시키거나 강제할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다.

나름으로 확대해석하면, 문학이 특정사상이나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문학의 독자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다양한 사상과 감정과 소재와 대상, 그리고 진실된 표현의 자유가 어떤 이유로든 구속되거나 억압되거나 강제될 수 없다는 말로 이해된다. 예컨대 사람이면 의당 갖고 있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이나 정서 그리고 생각하는 것마저 천차만별이요 각양각색이다. 어찌 이것을 도덕의 논리로만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뒤집어 말하면, 도리에 어긋나는 글도 쓸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물론 이러한 도문분리론의 바탕에는 문장보다는 근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의 사람됨(道)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도문양단론이라고도 한다. 

조선에서의 도문분리론은 저암 선생에 앞서 동계 조귀명(趙龜命, 1693∼1737)선생이 주장한 바가 있다. 조선 문학에서의 도문분리는 굳이 거론하자면 허균, 김만중 을 필두로 소위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표적인 문인인  연암 박지원, 이옥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들과 주로 양명학 계열과 중인 출신의 문인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졌다. 개인적인 여담으로 내 경우,  글쓰기에서 '도문일치' 쪽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면 글쓰기에서 어김없이 사람됨의 도리를 강조하고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척 하려는' 경향성을 자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까마귀가 온몸에 흰칠을 하고 백로의 행세를 한다고 해서 백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까마귀와 백로가 가진 색깔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여 그 존재의 우열을 비교 평가하고 호불호를 따진다는 것은 심각한 편견이다. 비록 잡글을 쓸지라도, 진정성있고 진솔한 글을 쓴다는게 참 어렵다.

유교의 도와는 그 개념에서 다소 다른 심오한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는 있지만, 노자는 도덕경에서 “언어로 표현된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며, (도를)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고 통찰한다. 현실에서 문학과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인문학, 유학, 종교 등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들이 내세우는 글과는 사뭇 다른 삶의 실상과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성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고 온갖 신비한 것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또 내 몸을 자랑하기 위해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3,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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