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실체는 이미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있을 뿐인데 / 유종원
강변에 배를 매어놓고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게 한 곳을 보(步, 부두)라고 한다. 영주성(永州城) 북쪽 외곽에 보(步)가 한 군데 있는데 그곳을 철로보(鐵爐步)라 부른다. 내가 배를 타고 와 이 지방에 거주한 지 햇수로 9년이 되었는데, 이곳 나루터를 철로(鐵爐, 쇠화로)라고 부르게 된 원인을 도처에서 알아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가 하는 말이 “그것은 일찍이 어떤 대장장이가 이곳에 살았었는데 그가 떠나고 대장간은 허물어져 지금 몇 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현재 그 이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세상에 실체는 이미 없어졌는데 이름만 남은 이런 경우가 정말 있단 말인가.” 하니, 철로보(鐵爐步) 부근에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유독 이곳만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현재 세상에는 자기의 성씨(姓氏)에 의지하여 천하에 행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가문(家門)은 대단하여 다른 가문이 우리와 견줄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지위(地位)와 덕행(德行)을 물으면 ‘오래 전에 나의 선조가 이미 지위도 있고 또 덕행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 가문은 대단하다.’ 하고, 세상 사람도 따라서 ‘어느 어느 가문은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헛되이 조상의 가문과 이름만 지니고 있는 것은 이 부두가 철로(鐵爐)라는 이름을 덮어쓰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가령 그 누가 이 부두의 이름을 듣고 발 달린 솥과 발 없는 솥, 그리고 삽ㆍ호미ㆍ칼ㆍ도끼 등 공구가 필요하여 돈을 들고 찾아온다 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자기 가문이 대단하다고 과시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지위와 덕행을 지닌 것이 있느냐고 추구한다면, 철로보(鐵爐步)에 와서 공구를 사려고 한 경우처럼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덕행이 없으면 그 가문이 대단해질 수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기꺼이 저들의 발밑에 엎드립니다. 당신은 어찌 그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유독 이곳의 일만 이상하게 여깁니까.
규모가 큰 측면에서 말한다면, 걸(桀)은 우(禹)의 후손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주(紂)는 탕(湯)의 후손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으며 유왕(幽王)과 려왕(厲王)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후손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선조의 이름만으로 천하를 깔보고 거만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제 정황은 추구할 줄 모르고 우선 자기들 선조의 이름으로 허세를 부리다가 끝내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러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이 철로보(鐵爐步)의 실제를 추구하였다가 발 달린 솥과 발 없는 솥, 그리고 삽ㆍ호미ㆍ칼ㆍ도끼를 얻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될 것이니, 또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지금 여기의 경우를 보고 놀라워하는 것은 지엽적인 일입니다.”
내가 알기로 옛날에는 태사(太史,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를 두어 민간의 풍속을 살피고 민간의 이야기를 채집했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채집한다면 소득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크게 찬동하여 채집할 만하다고 인정하였기에 글로 써서 지문(志文)으로 남긴다.
-유종원(柳宗元,773~819 ), '영주철로보(永州鐵爐步)',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 권7 기(記)-
▲원글출처: 동양고전종합DB(http://db.cyberseod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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