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기(讀數記): 백이전을 11만번 읽다
【이것은 문집 속에 굳이 쓸 것이 아닌데 일부러 기록하였다. 나태한 후손으로 하여금 곳곳마다 보게 하여 선조께서 부지런히 배운 것을 알아 그 만의 한 가지 뜻이라도 계승토록 하고자 한 것이다.】
「백이전(伯夷傳)」은 1억1만3천 번(당시의 1억은 만의 열배, 즉 십만을 의미, 11만3천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 「분왕(分王)」, 「벽력금(霹靂琴)」, 「주책(周策)」, 「능허대기(凌虛臺記)」, 「의금장(衣錦章)」,「보망장(補亡章)」은 2만 번을 읽었다. 「제책(齊策)」, 「귀신장(鬼神章)」, 「목가산기(木假山記)」, 「제구양문(祭歐陽文)」, 「중용서(中庸序)」는 1만8천 번, 「송설존의서(送薛存義序)」, 「송원수재서(送元秀才序)」, 「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5천번, 「획린해(獲麟解)」, 「사설(師說)」, 「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承廳壁記)」, 「송궁문(送窮文)」, 「연희정기(燕喜亭記)」,「지등주북기상양양자상공서(至鄧州北寄上襄陽子(于)相公書)」, 「응과목시여인서(應科目時與人書)」, 「송구책서(送區冊序)」, 「마설(馬說)」, 「오자왕승복전(杇者王承福傳)」,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 「후십구일부상서(後十九日復上書)」, 「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書)」, 「송료도사서(送廖道士序)」, 「휘변(諱辨)」, 「장군묘갈명(張君墓碣銘)」은 1만3천 번을 읽었다.「용설(龍說)」은 2만 번을 읽었고 「제악어문(祭鰐魚文)」은 1만4천 번을 읽었다.모두 36편이다.
「백이전(伯夷傳)」, 「노자전(老子傳)」, 「분왕(分王)」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크기 때문이었으며,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었다.「제책(齊策)」, 「주책(周策)」을 읽은 것은 기굴(奇崛, 남달리 크게 독특함)해서 이고 「능허대기(凌虛臺記)」, 「제구양문(祭歐陽文)」을 읽은 것은 담긴 뜻이 깊어서였다. 「귀신장(鬼神章)」,「의금장(衣錦章)」, 「중용서(中庸序)」 및 「보망장(補亡章)」을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고 「목가산기(木假山記)」를 읽은 것은 그 웅혼함(웅장하고 막힘이 없음) 때문이었다.「백리해장(百里奚章)」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하나 뜻이 깊어서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은 것은 그 광대함이 넘쳐흐르면서도 농욱(醲郁 짙고 치밀함)하기 때문이다. 무릇 이 여러편의 각기 다른 문체들을 읽는 이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 및 반고의 『한서』 또 『중용』과 『대학』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는 싣지 않았다.
만약 훗날의 자손이 나의 『독수기』를 보게 된다면 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경술년 늦여름에, 백곡노인이 괴산의 취묵당(醉默堂)에서 쓰다.(박황희 역)
-김득신(金得臣, 1604~1684), '독수기(讀數記)', 백곡집(柏谷集)/기(記)-
▲번역글 출처: 『백곡 김득신 산문 선역(柏谷 金得臣 散文 選譯)』(박황희 논문, 고려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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