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설(童心說)-이지(李贄)
동심설(童心說)
(龍洞山人)은 그의 서상기(西廂記) 끝 부분에서 말하기를,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아직 동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대저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갖게 되는 본심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게 되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래의 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며,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대저 최초의 마음이 어찌하여 없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원래 그 시초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마음 안에서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도리(道理)가 견문(見聞)으로부터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쌓이니 아는 것과 느끼는 바가 나날이 넓어지게 된다.
또 미명(美名)이 좋은 줄 알고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좋지 못한 평판이 추한 줄도 알게 되고도 그것을 가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게 된다.
무릇 도리와 견문은 모두가 많은 책을 읽어 의리가 무엇인지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 어찌 글을 읽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 분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동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설사 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이라 해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그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보통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책을 읽고 의리를 깨우침으로써 도리어 동심을 가렸는데,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독서로 의리를 깨우치려다 자신의 동심을 가리게 되었다면, 성인들은 또 어째서 많은 책을 지으시고 말씀을 남기셔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동심을 가리게 하였을까?
동심이 가려지고 나서 말을 하면 그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고, 천거를 받아 정치를 하게 되면 정사에 기초가 없어지며, 저술한답시고 문장을 지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문장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내용에 내포된 바가 독실해 빛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니, 한 구절 덕스러운 말이나마 구하려 해도 끝내 얻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동심이 이미 가려저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견문과 도리가 마음자리를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견문과 도리가 마음이 되고 나면 말하는 것이 모두 견문과 도리의 말이요. 동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언사가 비록 아름다워도 나에게 무엇이겠는가? 어찌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문장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그 사람이 거짓되면 모든 것이 거짓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을 거짓된 사람에게 말해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고, 거짓된 일을 거짓된 사람에게 알려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된 문장을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거짓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기뻐하지 않을 바도 없는 것이다.
온 장내가 거짓이니 구경하던 난쟁이가 무슨 말을 재잘거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비록 최고로 잘된 문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짓된 사람에 의해 (인멸湮滅)되어 후세에는 볼 수 없게 된 글들이 또 어찌 적다하리. 어찌하여 그러할까?
천하의 명문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심을 항상 지닐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견문은 행세하지 못하며, 언제 지어도 훌륭한 글이 되고, 어떤 사람이 지어도 좋은 글이 되며, 어떤 체제의 글을 지어도 빼어난 글 아닌 경우가 없게 된다. 시는 왜 꼭 고시(古詩)에서 뽑아야 하고, 문장은 왜 꼭 선진(先秦)의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
후세로 내려와 육조시대(六朝時代)가 되자 시는 바뀌어 근체(近體-중국 당나라 때 이루어진 한시의 형태로 절구나 율시 같이 구수, 자수, 평측 등에 엄격한 규칙을 지님)가 되었다. 또 변해서 전기(傳奇-문어체로 쓰인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문학 양식)가 되고, 변해서 원본(院本-송대에서 원대 잡극이 성숙하기 이전까지 유행했던 희곡 작품)이 되어 잡극이 되었으며, 서상곡(西廂曲)과 수호전(水滸傳)이 되기도 하고, 오늘날의 과거문장이 되기도 하였다.
현인들의 말과 성인들의 도가 모두 고금의 명문으로 시세의 선후만 갖고는 논할 수 없는 글들이다. 이렇듯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동심에서 우러나온 명문들에 감격하고 말았으니, 거기에 무슨 육경(六經)을 말할 것이 있으며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육경이나 논어 맹자는 사관들이 지나치게 추켜세워 숭상한 말이 아니면, 그 신하와 자식들이 극도로 찬양하고 미화시킨 언어일 뿐이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세상물정 어두운 문도와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낼 때 앞뒤는 잘라먹거나 뒤를 얻고 앞을 빠뜨린 채 제멋대로 자신의 견해를 따라 책에다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후학들은 이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성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여기고 경전으로 지목해버렸는데, 그 대부분은 성인의 말씀이 아닌 줄 누가 알겠는가?
설사 성인께서 하신 말씀일지라도 요컨대 목적이 있어 나왔으니 병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약을 처방하여 이들 제자와 물정 어두운 문도들을 일깨우려 하셨을 따름인 것이다. 거짓된 병을 치료하는 데 드는 처방은 고정불변인 것이 되기 어려우니, 이것들이 어떻게 만세의 지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경과 논어 맹자는 도학자가 내세우는 구실이고 거짓된 무리들의 소굴일 뿐이니. 그것들이 결코 동심에서 나온 말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해진다. 슬프다! 나는 또 어찌해야 동심을 잃지 않은 진정 위대한 성인을 만나 그와 한 마디 말과 글이나마 나눠볼 수 있을까?[李贄1527~1602 李卓吾, '동심설(童心說)『분서(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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