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쫓아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할 때
어린애들 노래에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이 바늘을 가지고 눈동자를 겨누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고, 또 속담에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하였으니,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하면서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하면서도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하물며 외세(外勢, 타인의 권세)*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힘으로써 남을 구제하는 것은 ‘협(俠)’이라 이르고, 재물로써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고(顧)’라 합니다. 고(顧)를 갖추면 명사(名士)가 되거니와, 협(俠)을 갖추어도 이름이 드러나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협과 고를 겸하면 ‘의(義)’라 하나니,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찌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예(禮)란 제멋대로 행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요, 의(義)는 제멋대로 결단함이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급하게 의에 따라 선(善)을 행하다 보면, 설령 제멋대로 행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기는 하지만, 착한 아들이라도 부모에게 여쭙지 못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어진 부모라도 이를 금지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漢) 나라 급암(汲黯)*은 황제의 조서를 사칭하고 창고 곡식을 풀어 하남(河南)의 주린 백성을 구제했고, 송(宋) 나라 범요부(范堯夫)*는 보리 싣고 가던 배를 석만경(石曼卿)에게 넘겨준 일이 있었습니다. 무릇 황제의 조서를 사칭한 것은 사형죄에 해당하는 것이요, 아버지 모르게 남에게 주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임금과 아비는 지극히 존엄한 분이지만, 의(義)에 비추어 급히 행해야 할 경우에는 부월(鈇鉞)의 처벌도 피하지 않았고 혼자 결단하여 행하는 죄도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武帝)는 총명한 군주라는 명성을 잃지 않았고 범 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은 어진 아비가 되었으며, 장유(長孺 급암(汲黯))는 곧은 신하가 되는 데 지장이 없었고 요부(堯夫)는 좋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준(俊)은 친상(親喪, 부모의 사망)을 당한지라, 친한 친구가 이처럼 측석(側席, 옆자리, 맥락상 곁에 있을 자리를 내줄 경황이 없음을 의미함)하고 밥을 배부르게 먹지 못할 때이니, 단지 하남(河南)의 굶주림과 석만경의 다급한 사정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가 힘을 다해 구제해 준다면, 이는 창고 곡식을 풀고 배의 보리를 넘겨준 행동만큼 멋대로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역자 주]
1.외세(外勢) : 타인의 권세(權勢)를 말한다. 《관자(管子)》 팔관(八觀)에 “권력을 쥔 자가 그의 재능과 무관하게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백성들은 효제충신을 등지고 외세를 구한다.〔權重之人 不論才能 而得尊位 則民倍本行而求外勢〕”고 하였다. 외세를 구한다는 것은 외국의 세력과 결탁하여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뜻이다.
2.한(漢) 나라 급암 :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하내(河內)의 민가 천여 호가 불에 타는 큰 화재가 발생하자 급암(汲黯)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러 보냈다. 급암이 하내의 상황을 보니, 백성들이 가뭄과 홍수로 만여 호가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임의로 황제의 명을 사칭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한 후 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자 무제가 훌륭히 여겨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연암집》에는 하내(河內)가 하남(河南)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남은 하외(河外)에 속한다. 《漢書 卷50 張馮汲鄭傳》
3. 송(宋) 나라 범요부: 요부(堯夫)는 범순인(范純仁)의 자(字)이고 만경(曼卿)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범순인이 젊었을 때 그의 부친 범중엄(范仲淹)의 심부름으로 소주(蘇州)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친의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을 만났는데, 석만경이 장례 비용이 없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배로 싣고 온 보리를 모두 그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범중엄에게 이 일을 말하자 범중엄이 기뻐했다고 한다. 《山堂肆考 卷102》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중일(中一)에게 보냄(與中一) 중에서 옮긴 순서대로 세번째 편지와 첫번째 편지, 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척독(尺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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