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
부지런하고 정밀하게 글을 읽기로는 포희씨(庖犧氏, 태호 복희씨(太皞伏羲氏)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고대 삼황 중 하나로, 전설에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역경에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한다.)와 대등할 이 뉘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의태(意態, 마음의 상태)가 우주에 널리 펼쳐 있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우주 만물은 단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不字不書之文)입니다.
후세에 명색이 부지런히 글을 읽는다는 자들은 엉성한 마음과 옅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낡은 종이 사이에 시력을 쏟아 그 속에 있는 좀오줌과 쥐똥이나 찾아 모으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술찌끼를 잔뜩 먹고 취해 죽겠다(謂哺糟醨而醉欲死 포위조리이취욕사).” 하는 격이니 어찌 딱하지 않겠습니까?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조(鳥)’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 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는 것이니,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더러는 늘 하던 소리만 하는 것이 싫어서 좀 가볍고 맑은 글자로 바꿔 볼까 하여 새 ‘금(禽)’ 자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글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뜰에 철 따라 우는 새가 지저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마구 외치기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 글자요(飛去飛來之字),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월(相鳴相和之書)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文章)이라 이를진대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 하였습니다.
※[역자 주]
1. 다섯 가지 채색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을 가리킨다. 문장(文章)이란 말에는 원래 무늬나 문채(文彩)라는 뜻이 있다. 순자(荀子)의 부(賦)에 “다섯 가지 채색을 갖추어야 문장이 이루어진다.〔五采備而成文〕” 하였다.(옮긴이 주: [다섯가지 채색] 개인적인 소견으로, 이 말은 문채, 즉 문장이나 글에서 자기 색깔, 그 나름의 독특하고 분명한 느낌이 우러나와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경지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答京之 之二)', 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척독(尺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옮긴이 주: 경지(京之)는 실명이 확인되지 않은 박지원의 친구인데, 누군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혹자들은 연암이 지기인 홍대용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교류를 자주 나눴는데, 이를 근거로 홍대용의 기록에서 홍대용과 집에서 교류를 나눈 흔적이 남아 있는 서예와 퉁소연주에 능한 이한진(李漢鎭, 1732~1815)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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