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사물로 인하여 성현이 누린 즐거움을 아는 일은 쉬운게 아니다
겸부(謙夫) 탁(卓) 선생 탁광무(卓光茂)가 광주(光州) 별장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오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을 말함)이 그 정자를 경렴(景濂)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대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호)의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그를 경앙(景仰)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리라.
대저 그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 물건에 마음을 쓰게 된다. 이것은 느낌이 깊고 후하기가 지극한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에게는 각기 사랑하는 화초가 있었다.’ 한다. 굴원(屈原)의 난초와, 도연명(陶淵明)의 국화와 염계의 연꽃이 그것으로 각각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물건에 붙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하겠다. 그러나 난초에는 향기로운 덕이 있고, 국화에는 은일(隱逸)의 높은 것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의 뜻을 볼 수가 있다.
또 염계의 말에, ‘연꽃은 꽃 중의 군자다.’ 하고 또 이르기를, ‘연꽃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 했다. 대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남과 함께 하는 것은 성현의 용심(用心, 마음을 쓰는 일)이며,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을 탄식하고 뒤에 오는 무궁한 세상을 기다렸으니, 진실로 연꽃의 군자됨을 알면 염계의 즐거움을 거의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인하여 성현의 낙을 아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황노직(黃魯直)이 이르기를, ‘주무숙(周茂叔 염계의 자, 주돈이를 말한다)의 흉중(胸中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쇄락(灑落,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즉 맑고 청정함)하여서 맑은 바람과 갠 달 같다.’고 하였다.
정자(程子)는 이르기를, ‘주무숙을 본 뒤로,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거운 곳과 즐거워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를 찾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는 풍월(風月)을 읊으며 돌아오는 것이 「나는 증점(曾點, 공자의제자)을 허여한다.」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도전(정도전)은 혼자 생각하건대, 염계를 경앙하는 방법이 있으니 모름지기 쇄락한 기상을 알아 얻고, ‘증점을 허여한다.’ 하는 뜻이 있은 연후에야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충공(文忠公)이 명(銘)하기를,
발 걷고 꿇어앉으니 / 鉤簾危坐
풍월이 가이없네 / 風月無邊
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옛사람이 단정한 공적인 안문(案文, 초안)이다. 어떻게 해야 그 정자에 한 번 올라 겸부(謙夫, 안분자족하고 마음이 맑고 겸손한 사람)와 같이 참여할 것인지 모르겠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경렴정 명의 후설[景濂亭銘後說]', 삼봉집 제4권/ 설(說)
'고전산문 > 삼봉 정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산문] 굽은 세상에서 죄가 되는 것 (0) | 2018.01.01 |
---|---|
[고전산문] 원망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이유 (0) | 2018.01.01 |
[고전산문] 진리가 어지럽혀지고 사람의 도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0) | 2018.01.01 |
[고전산문] 따르는 사람(從者)을 보아서 그 선생을 안다 (0) | 2018.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