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나
옛날에 붕우(朋友, 벗)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제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도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도 답답한 말이다. 천고의 옛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누가 장차 ‘제 2 의 나’가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인이 되겠는가.
양자운(揚子雲, 양웅)*은 당세의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탄하면서 천년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으며, “내가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내가 읽으면서, 눈으로 그 책을 보면 눈이 자운(子雲)이 되고, 귀로 들으면 귀가 자운이 되고, 손으로 춤추고 발로 구르면 각각 하나의 자운이 되는데, 어찌 굳이 천년의 먼 세월을 기다릴 게 있겠는가.”하였다.
나는 이런 말에 또다시 답답해져서, 곧바로 미칠 것만 같아 이렇게 말하였다. “눈도 때로는 못 볼 수가 있고 귀도 때로는 못 들을 수가 있을진대, 이른바 춤추고 발 구르는 자운(子雲)을 장차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누구로 하여금 보게 한단 말인가. 아, 귀와 눈과 손과 발은 나면서부터 한몸에 함께 붙어 있으니 나에게는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은데, 누가 답답하게시리 천고의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리석게시리 천세의 뒤 시대를 굼뜨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아, 나는 《회성원집, 청나라 문인 곽집환의 문집》*을 읽고서 나도 몰래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속으로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봉규(𡊋圭, 곽집환) 씨와 더불어 이미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으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道)도 서로 비슷하다 하겠는데, 어찌 서로 벗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기필코 장차 서로 벗을 삼을진대 어찌 서로 만나볼 수 없단 말인가. 두 지역의 거리가 만리(萬里)인즉, 지역이 멀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아, 이미 서로 만나 볼 수 없는 처지라면 그래도 벗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봉규 씨의 키가 몇 자인지, 수염과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용모도 알 수 없다면 한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장차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식으로 벗을 삼을 것인가?”
봉규의 시(詩)는 성대하도다! 장편의 시는 소호(韶頀) 풍악*이 일어나듯 하고, 짧은 시들은 옥이 부딪치듯 맑게 울린다. 시가 차분하고 기품이 있으며 따뜻하고 우아함은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깊이 있고 쓸쓸함은 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또 이 시를 지은 이가 자운(子雲)인지, 읽는 이가 자운인지 모르겠다.
아, 언어는 비록 다르나 문자는 똑같으니, 그가 시에서 즐거워하고 웃고 슬퍼하고 우는 것은 통역을 안 해도 바로 통한다. 왜냐하면 감정을 겉으로 꾸미지 않고, 소리가 충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봉규 씨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리는 이를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이를 위문할 것이다.
※[역자 주]
1.회성원집(繪聲園集) : 청 나라 산서인(山西人) 곽집환(郭執桓 : 1746~1775)의 문집이다. 곽집환은 자가 봉규(𡊋圭)ㆍ근정(勤庭)이며, 호가 반오(半迂)ㆍ동산(東山)ㆍ회성원(繪聲園)으로, 시를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곽집환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인 《회성원집》에 대해 조선 명사들의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홍대용과 아울러 연암이 《회성원집》의 발문을 짓게 되었다. 《熱河日記 避暑錄》 《湛軒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2. '제 2의 나' ,주선인(周旋人):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첫머리에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곧 나의 반쪽이요 바로 제 2 의 나이다.〔吾友非他 卽我之半 乃第二我也〕”라고 하였다. 주선인(周旋人)은 보통 시중드는 사람이나 문객(門客)을 뜻하는데, 당(唐) 나라 이전에는 한때 붕우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晉書 卷99 陶潛傳》 《宋書 卷89 袁粲傳》
3. 벗 붕(朋)자, 벗 우(羽)자 : 마테오 리치의 설을 취한 것이다. 《교우론》의 원주(原註)에 “우(友) 자는 전서(篆書)로는 ‘㕛’로 쓰니 이는 곧 두 손으로서, 꼭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붕(朋) 자는 전서로는 ‘羽’로 쓰니 이는 곧 양 날개로서, 새가 이를 갖추어야 바야흐로 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붕(朋) 자에 대해서는 붕(倗) 자의 가차자(假借字)라는 설, 봉(鳳)의 옛글자라는 설, 두 개의 월(月) 자, 또는 육(肉) 자, 또는 패(貝) 자를 합친 것이라는 설 등 정설이 없다. 우(友) 자는 손을 뜻하는 우(又) 자 2개가 합쳐진 회의자(會意字)이다.
4. 양자운(揚子雲) :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이다. 자신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양웅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와 반드시 이 저술을 애호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서》 권87 양웅전(揚雄傳)에는 보이지 않으며, 한유(韓愈)의 여풍숙논문서(與馮宿論文書)에만 나온다. 이어서 한유는, “양웅이 죽은 지 거의 천년이 되었으나 끝내 아직도 양웅이 나오지 않았으니 한탄스럽다.”고 했다.
5. 소호(韶頀) : 은(殷) 나라 탕(湯)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고, 소(韶)는 순(舜) 임금 때의 궁중음악, 호(頀)는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 태평성대의 음악을 가리킨다.
6.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 : 낙수는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하(洛河)를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에서 하수(河水)의 여신(女神)을 묘사하기를 “경쾌한 모습이 마치 놀라서 날아오르는 기러기 같다.〔翩若驚鴻〕”고 하였다.
7. 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 :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 “낙엽 지는 동정호를 떠난다.〔辭洞庭兮落木〕”고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의 구가(九歌) 중 ‘상부인(湘夫人)’에 “동정호에 파도 일고 낙엽이 지네.〔洞庭波兮木葉下〕”라고 한 구절에 전고(典故)를 둔 것이다.
-박지원(1737~1805), '회성원집 발문(繪聲園集跋)',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반쪽이니, 바로 '두번 째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을 자기처럼 여겨야 한다. 때로는 평소에 아무 일 없을 경우 벗의 진위를 가려 내기 어렵지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벗의 진실이 드러난다. 대체로 일이 급할 때 진실한 벗은 더욱 가까워지고, 거짓된 벗은 더욱 소원해진다...벗을 사귀기 전에 마땅히 먼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살펴야만 하고 사귄 후에는 마땅히 그를 믿어야 한다....오늘의 벗이 나중에 변해서 원수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원수가 변해서 벗이 되기도 한다. 어찌 삼가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벗과 사귀면서 만약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 알고 보탬에 재차 마음 쓰지 않는다면,그 벗은 장사치일 뿐이지 벗이라고 말할 수 없다...자신이 벗이 되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벗할 수 있겠는가?" (마테오리치 1552~1610, '교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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