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문장의 도(道)

수재(秀才)가 나에 대해서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나에게 와서 문자를 묻는 것으로 일을 삼곤 하였는데, 그렇게 혼자서 자기 나름대로 학업을 닦은 지 1년쯤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나에게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한마디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이것이 어쩌면 수재가 장차 과거(科擧) 공부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말을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일까? 과거와 관련된 글이라고 한다면 내가 물론 선배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단지 나이가 어렸을 적에 반짝하는 재주를 한번 보여서 갑자기 급제한 것일 뿐으로서, 대체로 과거 공부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해 본 일이 일찍이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공부하는 것 자체를 구차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이로운 일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꼭 의리(義理)에 입각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린다는 명분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꼭 실질적인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유(先儒)도 과거 공부를 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뺏기면 안 된다고 매우 엄하게 경계하였으니, 우리 고명(高明)한 수재에게 이 공부를 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요, 고명한 수재 역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스스로 급급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보다 한 등급 위에 올라가서 힘써야 할 것을 찾는다면 이른바 문장지문(文章之文)이라고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수재가 읽은 한자(韓子, 한유)의 글 속에서 대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위로는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을 엿보고, 아래로는 《장자(莊子)》와 이소(離騷)에 미쳤다.(上規姚姒 下逮莊騷)”는 등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글의 내용을 풍부히 하여 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이용 가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보배로 여겨 아끼는 것은 필시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다.(家中百物 皆賴而用 然所珍愛 必非常物)”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기필코 기궤(奇詭)한 문자를 쓰려고 애써서도 안 되지만 기궤한 문자를 굳이 싫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가 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 근원과 단절되지 않도록 하면서 우리 몸을 마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不可以不養也 無絶其源 終吾身而已矣)”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더더욱 끊임없이 정진하여 문장의 도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장의 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옛사람처럼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한결같이 옛사람과 똑같이 되려고만 한다면, 그것 역시 문장의 도에 가깝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한자(韓子)가 번소술(樊紹述)을 일컬으면서 지어 준 글을 보면, “옛사람의 일언일구도 답습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 얼마나 하기 어려운 일인가.(不襲蹈前人之一言一句 又何其難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또 기궤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를 위해서 지어 준 명(銘)에, “신성한 고문(古文)의 도가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궁하면 통하는지라 우리 소술을 일으켰네. 문자가 고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각자 타당한 직분을 알고 있나니, 찾아보고 싶거들랑 이 자취를 살펴보소.(神徂聖伏道絶塞 旣極乃通發紹述 文從字順各識職 有欲求之此其躅)”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한번 음미해 볼 만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한자(한유)가 식직(識職, 마땅히 있어야할 위치를 아는 것)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주목되는데, 이것은 바로 그가 청위(聽位,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점)라는 어휘를 쓴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글은 한공(韓公)이 일시적으로 타인의 돋보이는 점을 인정해서 그렇게 말해 준 것일 뿐이요, 소술이 과연 그러한 경지에 제대로 이르렀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문자가 성인의 그것과 통하지 않게 된 이것이 바로 도(道)가 막히게 된 이유라고 한다면, 다만 문자가 고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만 하더라도 성인의 글과 통한다고 할 것이니, 이러한 뜻에서 소술의 글이 하나의 모범이 될 수도 있다고 일컬은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과연 문장이라는 것도 결코 작은 도가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선유(先儒)가 경계한 바,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따위는 여기에 낄 수도 없다고 할 것이니, 우리 수재는 이 점을 깨닫고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수재가 어찌 이 정도에서 그쳐서야 되겠는가.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문사(文辭)를 닦아서 자신의 참된 뜻을 드러낸다.(修辭立其誠)”는 말이 있으니, 군자가 문사를 닦을 때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은 정신으로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정자(程子)가 말한 대로* 그 ‘수(修)’라는 글자가 ‘수식(修飾)’의 수(修)가 아니라 ‘수성(修省)’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체(體) 속에 고유(固有)하게 내재해 있는 것이다. 원래 미발(未發, 아직 발동하지않은 상태)이든 이발(已發, 이미 발동하여 드러난 상태)이든 간에 한결같이 중(中)의 상태를 유지하며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 우리가 중(中)이라고 하는 것이고, 본래 진실되고 망녕됨이 없어서 털끝만큼도 허위나 가식(假飾)이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 우리가 성(誠)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방을 쌓고 우리에 가두듯 삿된 요소가 없게 하면 성(誠)이 자연히 보존될 것이요, 부지런히 닦고 성찰하여 망녕된 요소가 없게 하면 성이 자연히 확립될 것이니, 이렇게 성을 보존하고 확립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덕과 합치될 수 있는 방법이라 하겠다. 이쯤 되면 문사(文辭, 글이나 문장을 꾸밈 또는 문장 그자체) 같은 것이야 굳이 의식적으로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아, 우리 수재는 이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기회에 한마디 덧붙여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내 나이 16세 때에 이율곡(李栗谷 이이(李珥))과 낙막락신상지(樂莫樂新相知)*의 시를 지으면서 동파(東坡)의 “내생에서도 다하지 않을 인연을 다시 맺자꾸나.[更結來生未了因]*”라는 한 구절을 우연히 끌어다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경성(京城)에 머무르고 계셨는데, 이웃에 사는 어른 한 분이 이 시를 갖다 드리자, 선생이 한번 보고는 말을 전해 오시기를, “바라건대 유자(孺子)는 이런 말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감히 평생토록 문학(聞學)으로 명자(名字)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때부터 지금까지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소의 문자를 쓸 적에 정식으로 불가(佛家)의 문자**를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이는 그래도 선생의 말씀을 두렵게 여긴 덕분에 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학들이 이런 일도 함께 기억해 두면 혹시라도 유익한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역자 주] 

1.완물상지(玩物喪志) : 작은 기예에 탐닉한 나머지 원대한 뜻을 잃는 것을 말한다. 송유(宋儒) 사양좌(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고 경계한 말이 《정씨유서(程氏遺書)》 3권에 수록되어 있다.

2. 정자(程子)가 말한대로 : 정명도(程明道)의 “수사입기성이라는 말을 자세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언사를 제대로 닦고 살피기 위해서는 성실한 자세의 확립이 요구된다는 말이니, 만약 언사를 수식하는 데에만 마음을 쓴다면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修辭立其誠 不可不子細理會 言能修省言辭 便是要立誠 若只是修飾言辭爲心 只是爲僞也]”라는 말이 《근사록(近思錄)》 권2 위학류(爲學類)에 나온다.

3. 낙막락신상지(樂莫樂新相知) : 이 세상의 즐거움 중에는 새로 사람을 알아서 사귀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뜻으로, 굴원(屈原)의 〈소사명(少司命)〉에, “살아서 이별하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고, 새로 사람을 알아서 사귀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悲莫悲兮生別離 樂莫樂兮新相知]”는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33 九歌二首》

4. 동파(東坡)의 한 구절: 소식(蘇軾)이 시사(時事)를 의논하다가 감옥에 갇혀 괴로운 날을 보내면서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아우인 자유(子由)에게 영결(永訣)을 고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 “너와 함께 대대로 형과 아우로 지내면서, 내생에서도 다하지 않을 인연을 다시 맺자꾸나.[與君世世爲兄弟 又結來生未了因]”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9 予以事繫御史臺獄云云》


-최립(崔岦 1539~1612), '오 수재(吳秀才) 준(竣) 에게 준 글(贈吳秀才 竣 序)', 『간이집(簡易集)』/ 간이집 제 9권/희년록(稀年錄)/-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9 


**※옮긴이 주: 선생의 글에 "정식으로 불가의 문자를 사용한 적이 없다"라는 글이 마지막 단락에 보인다. 이는 맥락상  불교에서 말하는 특정 사상(說)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나 도리, 철학 등으로 실체와 실상을 검증하고 밝힐 수 없는 설이나 이론, 이념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말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것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할 수 없는 것들, 즉 사실(事實)에 토대(土臺)하여 진리(眞理)를 탐구하거나 이치와 그 도리를 밝힐 수 없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선생은 대표적인 실례로 불교의 내세설(來世說, 윤회설)을 에둘러 들고 있다. 이로 보건대, 비록 지식으로 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심정적, 감정적으로 인정하고 또 수용하는 사상일지라도, 공식적인 문장으로 논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또 배제하여 글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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