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오영잠(惡盈箴):스스로 교만을 경계하는 글
내가 지난 겨울에 역(驛)에 온 뒤로 정신이 편안해지면서 기력이 나아져 예전보다는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게 되었으므로, 나 자신도 꽤나 다행으로 여긴 나머지 간혹 가까운 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떠벌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풍(頭風)을 앓아 하루가 넘도록 그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으므로, 기괴하였다 마치 귀신이 엿보고 있다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까지 22년을 살아오는 동안, 제대로 이루어진 일이 하나도 없었고 하루도 몸이 편한 날이 없었다. 그동안 조금 계교(計較:사물이나 진리나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비교하는 것)를 하다가 다행히 이루어질 희망이라도 있을라 치면, 그때마다 번번이 낭패를 당해 쓰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아픈 증세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내 몸과 하는 일이 서로 갈등을 빚고 나의 운명과 행동이 서로 알력을 빚는 가운데, 온갖 병마(病魔)에 시달리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스스로 반성하며 두려워하는 심정을 가지고 하늘의 밝은 위엄에 대해서 통절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하니 작은 그릇은 빨리 차서 넘치기가 쉽고, 고인 빗물은 쉽게 말라 버리기가 십상인데, 털끝 하나를 얻었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머리카락 한 올을 가졌다고 삼만 근(斤)의 무게에 맞서면서 스스로 대단하게 여긴다면, 하늘이 지금까지 화(禍)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서 계속 재앙을 내려보낼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 하늘이 장차 곤궁과 질병을 통해서 나를 온전하게 이루어 주실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다면 내가 항상 동심인성(動心忍性: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孟子/告子下)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가 계기가 찾아오면 떨쳐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또 그 반대로 장차 하늘이 나를 곤궁과 질병 속에 신음하다가 그냥 죽게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내 입장에서는 자신을 닦고 기다리며 그 뜻을 받들어 순리에 맞게 처신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법망(法網: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의 준칙)의 바깥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거역하는 죄를 성급하게 범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겸허한 자에게 하늘이 복을 내려 주는 그 의리를 취하여 나의 허물을 자책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이 잠(箴)을 짓는 바이다.
洪鈞命物(홍균명물) : 하늘이 만물을 이 세상에 내실 적에
或値其奇(혹치기기) : 기구한 때를 만나게 할 수도 있겠으나
順斯承斯(순사승사) : 그 뜻을 순응하고 받들어 모셔야만
乃分之宜(내분지의) : 그야말로 분수에 마땅하다 할 것이니
孰敢拂逆(숙감불역) : 어찌 감히 여기에 어긋나게 행동하여
以干明威(이간명위) : 밝은 위엄을 범해서야 되겠는가
智者畏天(지자외천) : 지혜로운 자는 하늘의 뜻을 경외(敬畏)하여
如事嚴父(여사엄부) : 마치 엄한 부친처럼 받들어 모시면서
韜鋩斂華(도망렴화) : 광망(光鋩)과 영화(英華)를 안에다 감추고는
守以貞固(수이정고) : 올곧고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거늘
愚昧罔念(우매망념) : 어리석은 자는 생각을 하려 하지 않고
自暇乃肆(자가내사) : 스스로 한가하게 제멋대로 행동하여
憂愁放蕩(우수방탕) : 근심과 시름 속에 난봉이나 부리면서
希幸圖冀(희행도기) : 요행히 잘 되기를 헛되이 기다리다
犯綱干紀(범강간기) : 기율(紀律)을 범하고 법을 어긴 나머지
重過速累(중과속루) : 결국은 중한 죄에 스스로 빠져 드는도다
眷余墮地(권여타지) : 돌아보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뒤로
年廿加二(년廿가이) : 어언 스물 하고 두 살을 먹는 동안
以悴以疾(이췌이질) : 시름 속에 잠기거나 병고(病苦)에 시달리며
爲困爲阨(위곤위액) : 온갖 고난과 환란을 다 겪었어라
一刻得飽(일각득포) : 어느 한 순간 배불리 먹고 나면
三旬之餓(삼순지아) : 한 달은 배곯아 지내기 일쑤였고
升勺獲利(승작획리) : 한 되나 한 홉의 이득을 얻고 나면
鍾石之害(종석지해) : 한 말이나 한 섬의 손해를 보았나니
東西蹇連(동서건련) : 동쪽과 서쪽에서 낭패를 당해 넘어지고
左右牽掣(좌우견체) : 오른쪽과 왼쪽에서 모두 견제를 당했도다
諄諄天誨(순순천회) : 하늘이 반복해서 가르침을 내려 주고
惓惓神告(권권신고) : 신명(神明)이 간절하게 일러도 주었건만
尙不自悟(상불자오) : 지금까지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 채
恐懼晦匿(공구회닉) : 두려워하면서도 숨기려고만 하였나니
持心躁妄(지심조망) : 마음가짐 역시 경망스러웠는지라
逞氣放逸(령기방일) : 기운을 뽐내면서 제멋대로 굴었도다
鷦鷯粒粟(초료립속) : 곡식 낱알 쪼아 먹는 메추라기가
抗志鵬翮(항지붕핵) : 구만 리 나는 붕새에 감히 대들었고
白小尺波(백소척파) : 얕은 물에 뛰노는 은어(銀魚) 한 마리가
睨意龍級(예의룡급) : 깊은 물 속 용의 뜻을 엿보았으니
鬼拍手笑(귀박수소) : 귀신이 돌아보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하고
天在上赫(천재상혁) : 하늘이 위에서 한 번 크게 노하실 일
降以災咎(강이재구) : 이에 재앙을 이 몸에 거듭 내리시어
式月斯亟(식월사극) : 달마다 급박하게 들이닥치게 하였나니
不率厥初(불솔궐초) : 당초에 그 뜻을 알고 따르지 못한 터에
雖悔何及(수회하급) :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戒之戒之(계지계지) : 모쪼록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지니
式自今日(식자금일) : 지금 이날부터라도 새롭게 출발해서
守墨守谿(수묵수계) : 수묵하고 수계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卑以自牧(비이자목) : 자신을 낮추면서 닦아 나갈 일이로다
塞兌垂簾(새태수렴) : 입을 꽉 다물고서 밖으로 발을 드리운 채
默然自保(묵연자보) : 말 없는 가운데에 자신을 보전할 것이니
一席之外(일석지외) : 내가 앉은 이 자리를 벗어난 그 바깥은
卽非我土(즉비아토) : 내가 밟고 다닐 땅이 아니라고 알지어다
今日尙矣(금일상의) : 오늘부터 시작하면 그래도 낫겠지만
明不暇給(명불가급) : 내일이면 벌써 걷잡을 수 없으리니
毋庸算甕(무용산옹) : 항아리를 끌어안고 계산하던 사람처럼
計較逆適(계교역적) : 생각으로만 치달리며 앞질러 가지 말지로다
常若欹器(상약의기) : 항상 의기를 옆에 놓았던 고사처럼
縮栗慓惕(축률표척) : 몸을 움츠리고 두려워 떠는 심정이면
汝身莫亢(여신막항) : 그대 감히 앞에 나와 교만을 떨지 못하리니
寧就他恤(녕취타휼) : 어찌 남의 걱정까지 도맡을 틈이 또 있을까
小人在難(소인재난) : 소인이라 할지라도 환란을 겪게 되면
亦克知悔(역극지회) : 그들 또한 잘못을 후회할 줄 알다가도
旣安旣平(기안기평) : 일단 안정되고 평안해지고 나면
反無所忌(반무소기) : 거꾸로 거리낌없이 더욱 날뛰나니
戒之戒之(계지계지) : 모쪼록 경계하고 경계를 할지어다
毋越斯規(무월사규) : 부디 이 잠규(箴規)를 어기지 말고
一事一日(일사일일) : 어느 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念茲在茲(념자재자) : 항상 이 경계를 염두에 둘지어다.(번역: 이상현)
-택당(澤堂)이식(李植, 1584∼1647), '오영잠'(惡盈箴),「택당집(澤堂集)」/ 택당선생 별집 제12권/잠(箴)-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역주
1)오영잠(惡盈箴) : 스스로 가득 찬 척 교만을 부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글이라는 말이다.
2)計較(계교): 사물이나 진리나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비교하는 것, 선택과 결단, 실행의 기로에서 욕심이 일어나 마음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익일까 손해일까, 더러운가 깨끗한가, 좋은가 나쁜가 하고 비교하는 마음. 계교심을 놓지 못하면 수행에 확고한 뜻을 세우기가 어렵고 본래 마음을 찾기가 어렵다. 계교심을 갖고 사물을 대하면 마음이 항상 흔들리고, 계교심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사람을 목적으로 보지 못하고 수단으로 보게 된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도 그의 시《蘇東坡詩集 卷14 薄薄酒》에서 “은거하여 뜻을 구함엔 의리를 따를 뿐, 동화문의 먼지나 북창의 바람은 아예 계교치 않네(隱居求志義之從 本不計較東華塵土北窓風)”라고 계교치 않는 마음이란 의리(義理), 즉 옳고 바른 것을 따르는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3)동심인성(動心忍性: 더욱 큰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온다.
4)遵養時晦(준양시회):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다가 때가 되면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시경(詩經)》 주송(周頌) 작(酌)에 나온다
5)爰取福謙之義(원취복겸지의):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천도는 가득 차면 허물어뜨리고 겸손하면 복을 주며, 지도는 위에 가득 차면 떨어뜨리고 아래에 겸허하면 계속 흐르게 하며, 귀신은 가득 차면 재앙을 내려 해치고 겸손하면 복을 준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라는 말이 나온다.
6)나의 허물을 자책하는 계기 : 공자가,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도 마음속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公冶長》
7)愚昧罔念(우매망념)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될 수 있고, 바보라도 제대로 생각을 할 줄 알면 성인이 될 수 있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는 말이 나온다.
8)自暇乃肆(자가내사) : 《서경》 주고(酒誥)에, “감히 스스로 한가함을 구하거나 스스로 평안하기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술 마시는 일을 감히 숭상했다 하겠는가.[不敢自暇自逸 矧曰其敢崇飮]”라는 말이 나온다.
9)守墨守谿(수묵수계): 아랫자리에 처하여 남과 다투지 않는 겸손한 덕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수묵은 수흑(守黑)과 같은 뜻인데, 《노자(老子)》 28장에, “수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는 말이 나온다.
10)입을 꽉 다물고서 : 《노자》 52장에, “입을 꽉 다물고 욕망의 문을 닫으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라는 말이 나온다.
11)欹器(의기):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항아리 하나를 애지중지하면서 밤에도 끌어안고서 자곤 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항아리 하나를 밑천 삼아 부자가 되는 생각에 젖은 나머지 기쁨에 겨워 춤을 추다가 그 항아리를 밟아 깨뜨려 버렸다는 ‘옹산(甕算)’의 고사가 전한다.(梅磵詩話 卷中)
12)常若欹器(상약의기): 교만하지 않고 항상 중도(中道)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단속하는 것을 뜻하는 고사이다. 노 환공(魯桓公)이 의기를 항상 옆에 두고 있었는데, 뒷날 공자가 사당에서 그 의기를 보고는, “내가 듣건데, 의기라는 그릇은 속이 비어 있으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적당히 채워져 있으면 반듯하게 서 있고, 가득 차면 엎어진다[虛則欹 中則正 滿則覆]고 하였다. …… 어찌 이 세상에 가득 차고서도 엎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惡有滿而不覆者哉]”라고 탄식한 기록이 전해진다. 《荀子 宥坐》
13)毋庸算甕(무용산옹) : 혼자 멋대로 생각을 치달리며 망상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항아리 하나를 애지중지하면서 밤에도 끌어안고서 자곤 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항아리 하나를 밑천 삼아 부자가 되는 생각에 젖은 나머지 기쁨에 겨워 춤을 추다가 그 항아리를 밟아 깨뜨려 버렸다는 ‘옹산(甕算)’의 고사가 전한다. 《梅磵詩話 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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