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뜬구름을 생각하는 까닭은 / 이색

화엄종의 중 의공(宜公)이 저번에 나에게 시(詩)를 보내 왔다. 그 시를 음미하고 나는 시 잘 짓는 중을 만났다고 생각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되었더니 옥천사(玉泉寺)에 머무르면서 나에게 수백 마디의 말을 쓴 편지를 부쳐 왔다. 뜻하는 바와 표현이 바로 문인(文人)과 더불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는 곧 의공(宜公)이 시문(詩文)에 뜻이 매우 두텁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서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지 오래였다.

금년 여름에 서울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구름(雲)으로 나의 마룻방의 이름을 붙였으니, 선생의 기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이미 그의 논의를 들으려고 하였으므로 곧 운헌(雲軒)이라고 이름을 지은 뜻에 대해 묻기를, “공은 어찌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장애를 받아 뜬구름을 쓸어버리려고 생각한 것입니까?” 하니, 그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은 어찌 마음대로 가고 향하는 것을 사모하여 법운(法雲)으로 올라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갑자기 깨달았다. 이 구름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그가 누워서 보는 구름일 것이다.

누워서 몸을 편안히 할 수 있는 것은 산속의 구름이며, 앉아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구름이다. 마루가 어두워지면 구름이 모인 것을 알고, 마루가 밝으면 구름이 지나간 것을 안다. 마루가 시냇가에 있으니 꽃이 곁에 있음을 사랑하고, 마루가 소나무와 마주 대하니 뜬구름이 사랑스럽다. 달이 마루에 들 때 구름이 가렸다가 지나가면 맑은 달빛이 더욱 좋고, 바람이 마루로 불 때 구름이 따라오면 찬 기운은 더욱 더한다. 

의공(宜公)이 그 안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 시는 더욱 문채가 나고 가사(歌詞)는 더욱 오묘한 경지에 들어갈 것이니, 절로 유익됨이 매우 많을 것이다. 그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서 비를 만들면, 은택은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흡족하게 되고, 공(功)은 제전(祭典)을 받들 만큼 높을 것이니 어찌 세상의 교화에 크게 도움되지 않겠는가. 

우리 스님이 사물까지 파급하는 마음이 여기에 드러난다. 사물에 파급하는 마음이 먼저 이처럼 정해지면, 뜬구름을 헤치고 법운(法雲)에 올라 자애의 구름으로 삼천 세계를 고루 덮을 것을 곧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다.

 -이색(李穡, 1328~1396), '운헌기(雲軒記) ', 『동문선 (東文選)』 / 동문선 제76권 / 기(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68

※옮긴이 주
1.()ㆍ수()ㆍ상()ㆍ행()ㆍ식():
불교의 경전인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을 가리킨다.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아(我)’란 가현(假現)일 뿐 실체가 아니며(非我), 불멸하는 본체로서의 자아는 없다(無我)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아현(我見)에 집착하는 것은 기필코 苦(고, 고통과 번민 dukkha)의 원인이 될 뿐이다. 붓다의 교설에 의하면 ‘我(나)’란 몸(色)과 마음(受․想․行․識)을 의미한다.(이남경, '심리치료를 위한 ‘我’에 관한 一考察')". 좀 더 구체적으로 ‘색色)’은 물질, ‘수(受)’는 느낌, ‘상(想)’은 생각, ‘행(行)’은 의지, ‘식(識)’은 인식하고 아는 제반 의식작용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이 ‘색(色)’,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분별하는 모든 정신적 활동이 곧 ‘수상행식(受想行識)’이다.  이 구절이 속한 전체 문장의 한자 원문은 이렇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풀이하면 ‘사리자여, 물질이 공(空, 빌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므로,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감각 지각 행위와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라는 뜻이 된다. 즉 아(我)는 물질로서의 몸과 정신활동으로서의 마음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공(空)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비어있음, 아무 것도 없음, 허공' 등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실체가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철학적 의미로도 해석된다. 나무만을 보고 숲을 논할 수 없다. 보편의 현실에서 구름은 눈으로 그 실체를 볼 수 있고 또 확인할 수 있지만, 막상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 공기 또한 마찬가지다. 실체는 여러 물질들의 복잡다양한 인과관계에 의해 통합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도 그리고 몸과 비교되는 마음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아울러 '실체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라는 점에서 공(空)의 논리, 즉 무아(無我) 혹은 비아(非我)의 논리가 비로소 가능해 진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무언가에 대한 '집착'은 마땅히 헛된 것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목은 선생이 뜬구름을 떠 올린 이유를 대뜸 '색수상행식의 장애'를 들어 물음은, 곧 '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인생 무상(無常, 덧없음)을 느꼈느냐?'로 나름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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