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대나무를 사랑하는 까닭 / 성현
내가 어렸을 때 언젠가 설당(雪堂, 소식(蘇軾))의
시를 읽고서 그 말이 크게 사리에 맞지 않는 점에 대해서 괴이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란 고기(肉)를 먹지 않으면 배가
부르지 않고, 배가 부르지 않으면 살이 찌지 않으며, 살이 찌지 않으면 기운이 점점 빠지고 지쳐서 결국에는 죽게 된다.
그럼에도 “밥 먹을 때 고기가 없는 것은 괜찮지만 거처하는 곳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라고 하였으니, 이는 양생(養生, 몸과 마음을 편케 하고 이롭게 하여 건강하게 사는 일)의 추환(芻豢, 다양한 종류의 육류)*을 도리어 목전의 완상물(玩賞物, 구경하고 즐기며 감상하는 물건)보다도 못하다고 본 것이다.
어느덧 내가 나이 들어 세파를 많이 겪고 나서야 고인의 의론(견해)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모두 구복(口腹, 입과 배)을
채워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심지(心志)를 길러서 그 몸을 보전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마음이 저속하고 뜻이
비루하다면 비록 살아 있더라도 세상에 보탬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설당이 대나무를 사랑한 까닭이다. 설당(雪堂)뿐만 아니라 고금의 달인들도 모두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대나무가 사람에게 어떤 보탬이 될까? 가지런하게 무성하고 조용하며 한가한 자태는 군자가 본받아 속세의 때를 털어 버리고, 속이
비고 마디가 곧은 모양은 군자가 본받아 마음의 문을 열고 사욕을 용납하지 않으며, 여름이든 겨울이든 홀로 푸른 의용은 군자가
본받아 개결한 지조를 지켜 변하지 않는다.
그 외에 서리 내린 댓잎에
안개가 걷혀 가는 풍경이나 금빛 같은 달빛이 대숲에서 새어 나오는 모양과 바람 불어 댓잎이 서걱대며 옥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등등 눈과 귀를 기쁘게 하고 마음의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이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이분〔此君*
차군, 대나무의 다른 말, 즉 대나무와 같은 성정 性情〕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나의 종숙 자정(子正, 성중성 成重性)
씨는 청주(淸州) 원좌산(元佐山) 아래에 사는데, 집을 새로 지어 대나무를 심고서 취균헌(翠筠軒)이라 이름하였다. 그러고는
날마다 그 사이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데, 초연히 세상의 명리를 초탈하여 싫증 낼 줄 모르는 듯하였다. 그러니 비록 재주와
명성은 설당과 차이가 날지 몰라도 그 마음과 뜻만큼은 한 번도 차이가 난 적이 없었다.
중원(中原 중국)의 부호들은 집 밖에 나가서는 여름 장맛비를 무릅쓰고 농장을 둘러보는가 하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상아로 만든 산대(숫자를 셈하는 막대기)를 잡고서 재물과 곡식을 계산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영리를 추구하다가 죽고 나서야 그만둔다. 이러한 사람은 모두 작은 것을 기르는 자이니 큰 것을 기르는 자에게 비웃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지난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고을의 경내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산기슭 언덕바지에 있는 종숙의 집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역마를
타고 가는 시간에 쫓기어 가 보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또 작은 재주로 관각(館閣)의 관리가 되어 성상(임금)을 모시고 있으니 구름과 안개에 덮인 숲에서 노닐기는 틀린 만큼, 비록 종숙의 취균헌에 앉아 종숙이 심은 대나무를 감상하고자 한들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나와 종숙은 다 같이 상곡공(桑谷公, 성석연)*의 후손이다. 그의 맑은 의표를 보고서 문장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서투른 말을 엮어서 이렇게 고하는 것이다.
※[역자 주]
1. 취균헌기(翠筠軒記) : 저자의
당숙인 성중성(成重性)의 취균헌에 대한 기문이다. 대나무를 좋아한 소식(蘇軾)이 쓴 시 〈승 오잠의 녹균헌에
대하여〔於潛僧綠筠軒〕〉를 인용하여,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중성의 삶의 태도와 맑은 의표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았다.
2.
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이 시구는 소식(蘇軾)의 〈승 오잠의 녹균헌에 대하여〔於潛僧綠筠軒〕〉라는 시의 일부이다. 이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고기가 없으면 몸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하네. 몸이 마른 것이야 살찌게 할 수
있지만, 선비가 속된 것은 고칠 수 없네.〔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이다. 이 시는 세속적 부귀보다는
고아한 삶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는데, 제목의 녹균헌(綠筠軒)은 푸른 대나무에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이다. 이 기문의
취균헌(翠筠軒) 역시 소식이 시에서 전달하고자 한 의미와 같은 맥락에 있다.
3.
추환(芻豢) : 맛있는 고기를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의리가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추환이 나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석에 “추(芻)는 풀을 먹는 짐승으로
소ㆍ양 따위이며, 환(豢)은 곡물을 먹는 짐승으로 개ㆍ돼지 따위이다.”라고 하였다.
4.
이분〔此君〕 : 대나무의 별칭이다.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집에 기거하는 동안에도 대나무를 빨리 심으라고
다그치자, 그 이유를 물으니, 그가 흥얼거리면서 대나무를 가리키며 “어찌 하루라도 이분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邪?〕”라고 반문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徽之》
5.
상곡공(桑谷公): 창녕 성씨(昌寧成氏) 상곡공파의 파조(派祖)인 성석연(成石珚, ?~1414)을 말한다. 자는 자유(自由)이고
상곡은 그의 호인데, 국왕의 휘(諱)를 피하여 나중에 석인(石因)으로 개명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의 아우로, 예문관 대제학과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성엄(成揜), 성억(成抑), 성급(成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현은 성엄의
손자이고 취균헌 주인 성중성은 성급의 아들이므로 ‘다 같이 상곡공의 후손’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현(成俔, 1439~1504), '취균헌기〔翠筠軒記〕' , 허백당집(虛白堂集)/ 허백당문집 제3권 / 기(記)-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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