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문장은 문기(文氣)를 위주로 한다 / 성현
문장은 문기(文氣*, 문장에서 드러나는 기운)를 위주로 한다. 문기(文氣)가 높으면 글도 따라 높아지고 문기가 시들하면 글도 따라 시들하니, 그 시문(詩文, 시와 산문)에 표현된 것을 보면 그 문기의 실체를 가릴 수 없는 것이다(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면 그가 쓴 글도 비루하여 누추한 문제가 있고 그 사람됨이 경박하고 조급하면 그가 쓴 글도
조급하여 각박한 문제가 있으며, 그 사람됨이 진실하지 않고 괴이하면 그가 쓴 글도 진실성이 없어 허탄한 문제가 있고 그 사람됨이
화려하고 방탕하면 그가 쓴 글도 방탕하여 사치한 데로 빠지며, 그 사람됨이 우울하고 원망에 차 있으면 그가 쓴 글도 원망에 차
있어 한스러운 데 빠지게 되니, 그 대체적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가형 안재의 시집 서문〔家兄安齋詩集序〕')
나무를 심는 사람은 반드시 그 뿌리를 북돋워 주어야 하니, 뿌리가 튼튼히 내리면 가지와 잎은 저절로 왕성하여 푸른빛을 드리우게 된다. 샘물을 끌어오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연원(물이나오는 근원)을
파내야 하니, 연원이 이미 트이고 나면 지류는 자연스럽게 물길이 트여 막히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없는 나무는
반드시 마르게 되고 연원이 없는 물은 반드시 끊기게 되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시를 배우는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풍소궤범서〔風騷軌範序〕')
시는
말하기 어렵다. 시를 말하는 자가 기(氣)를 논하면서도 이(理)를 논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기(氣)는 밖에서 행해지고
이(理)는 안에서 지키니, 안에서 지키는 것이 단단하지 않으면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법도를 벗어나 정도를 잃는 것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이(理)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이(理)를 깨달았기 때문에 근본을 잃지 않는 것인데, 만약
근본을 잃는다면 비록 호탕하고 농염하게 온갖 형상을 아로새겼다 하더라도 시라고 할 수 없다.
고려 말엽에서 국조(國朝 조선을 지칭함)에 이르기까지 시로 이름난 대가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를 깨달은 사람은 대체로 적었다. 평담한 것은 조야(粗野 조잡스럽고 거칠음)한 문제가 있고 호방한 것은 번다한 폐단이 있으며 기이한 것은 험벽(險僻, 위태롭게 치우침)한 문제가 있고 공교한 것은 쇄세(瑣細, 자잘하고 사소함)한 폐단이 있어 속습이 끝내 시들해져서 회복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다. 슬프다! 이것이 시의 불행이라 하겠다.(뇌계시집서〔㵢溪詩集序〕)
-성현(成俔, 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허백당문집/ 서(序) 부분발췌-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
※[옮긴이 주]
1. 문기(文氣): 문기(文氣)는 '문장에서 드러나는 기운'을 뜻한다. 문학에서 문기(文氣)의 개념은 대체로 조조의 아들로 훗날 위문제가 된 조비(曹丕)를 시초로 한다. 조비는 《전론
典論. 문론 論文》에서 "문장은 기(氣)를 위주로 하는데, 기(氣)의 맑고 탁함은 타고나는 것으로 힘으로 억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비록 그러한 재능이 부형에게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자제에게 옮겨줄 수 없다" 라고 통찰했다. 기(氣)는
타고났거나 또는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계발 가능한 재능과는 다른 것이다. 기(氣)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 본연의
성(性)에 그 바탕을 두고 그 실체가 밖으로 드러나는 까닭에 타인이 그 기운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조비 이후에 동진의 학자인 갈홍(葛洪)은 《抱朴子.尙傳》에서 "문장의 맑음과 탁함은 들숙날숙하며, 그 마음에 품은 바가 각기 다르고, 뛰어남과 몽매함이 서로 다르며, 강함과 약함이 다른 것은 그 기(氣)가 글쓰는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문기론을 펼쳤다. 고려의 문인인 최자(崔滋)는 "시문은 기(氣)를 위주로 삼는다. 기(氣)는 성(性, 본성)에서 발현하고, 의(意, 뜻)는 기(氣)에 의거하며 말(言)은 정(情, 감정, 정서)에서 나오는데, 정(情)은 곧 의(意)다." 라고 문기론을 역설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혜강 최한기 선생은 관념이 아닌 실제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경험, 관찰, 탐구, 검증을 통해 기(氣)철학을 정립하였다. 정리하면, 기(氣)는 글쓰는 사람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그 사람만의 독특한 문체를 결정짓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곧 문기란,
글 쓰는 사람의 지적역량, 학식, 식견, 성격, 품성, 감성, 정서, 재능 등이 어우러져 문장을 통해 그 사람만의 개성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전통적인 동양 고전 문학 평론에서 문기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에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일부 인문 작가들에 의해 특정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문기(文氣)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의 문기는 "문화의 기운"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문화의 뜻은 사전에,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문화의 의미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까닭에 이와 관련지어 사용하는 문기라는 단어는 그 뜻이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용하는 사람이 긴가민가할 정도로 개념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단어의 사용은 지양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이들이 문화와 관련지어 사용되는 문기의 의미를 나름 정리해보면, '문학 또는 예술작품에서 무언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운치가 있으며 아울러 교양의 깊이와 격조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러한 이해는 은근히 지성과 교양과 세련된 고급문화를 강조하는 소위 엘리트주의의 시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사고가 그 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가 나름 생각해 본다. 뒤집어 말하면, 작품에서 문기의 여부에 따라 작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라는 의미이며, 또는 문기를 느끼는 여부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지적 혹은 문화적 수준이나 교양을 가늠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심리적으로 무언가 우월의식이 그 바탕에 깔린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문기론에 의하면, 문장에서 문기는 특정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한 기운이 아니다. 글을 대하고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느낄 수 있는 기운이 문기(文氣)다. 여하튼 동양 고전 문학의 글쓰기에서 말하는 문기의 개념과 문화적 차원의 문기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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