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비록 맛은 같지 않아도 / 성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육경(六經,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 외에는 모두 헛된 글입니다. 경(經)은 치도(다스리는 도리나 방법)의 율령(법률)과 같은 존재이니 마땅히 우선해야 할 것이고, 사가(史家)의 기록으로 말하자면 또한 빼놓을 수는 없지만 과장하고 꾸미는 폐단을 면치 못합니다. 더욱이 역사서 외에 괴이하고 궁벽한 것을 기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식견이 매우 막힌 것이다. 이는 음식을 먹는 자가 단지 오곡만을 알고 다른 음식의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무릇
육경은 깨끗한 오곡과 같고 《사기(史記)》는 맛이 훌륭한 고깃점과 같으며, 제가(諸家)들이 서술한 것은 온갖 과일이나 채소와
같다. 맛은 비록 같지 않지만 내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면 모두 기혈과 골수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시경》에 〈장자(墻茨)〉와 〈순분(鶉奔)〉*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공자(孔子)가 산삭(필요 없는 글자나 글귀를 지워 버림)해
버리지 않았고 사가(史家)의 골계전(滑稽傳)을 태사공(太史公)이 기록하였다. 이는 산삭해서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도 오히려
산삭해 버리지 않았으니 대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아서 악을 징계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제해(齊諧)》*는 괴이한 이야기를 적은 책인데 남화자(南華子 장자(莊子))가
이를 본받아 그 말이 더욱 괴이하였다. 그러나 훗날 글을 짓는 사람들이 모두 그 법을 숭상하여 이를 고무하였다. 한나라 이래로
역사를 기록한 사가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모두 조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록하여 문견을 넓히는 자료로 삼았으니, 만약 제가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야외(野外)의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선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하는 풍교(風敎)에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나라의 역사에 도움이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미미하다 하겠는가.
우리나라에 명색이
유자(儒者)가 한두 분이 아니었지만 한갓 시문의 아름다운 말로 글을 지을 줄 알았지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모범을 드리우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오직 이인로(李仁老), 최자(崔滋), 이제현(李齊賢)이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도 시화(詩話)만을 기록하고 광범위하게 당시의 일을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웃을 만하다.
내 친구 채기지(蔡耆之)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낼 때 평소 들었던 것과
비록 속되고 저급하더라도 동료들과 나눈 농담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그 부지런히 저술하고 착실히 힘을 들인 것을 볼 때
문학에 능숙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후인의 권계가 될 만하고 야외의 일사(逸史)가 될 만하며 노경의 취미
거리가 될 만하고 한가히 지낼 때의 음악이 될 만하다. 마치 사탕수수를 씹는 것과 같아 맛을 보면 차츰차츰 빨려 들어가 싫증이
나지 않으니, 어찌 육경 외에는 모두 헛된 글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병진년(1496, 연산군2) 동짓날에 경숙(磬叔)은 서문을 쓴다.
※[역자 주]
1.촌중비어서(村中鄙語序)
: 《촌중비어》는 채수(蔡壽)가 지은 패설집으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서문은 1496년(연산군2) 동지(冬至)에
작성되었다. 이 글에서 저자는, 육경(六經) 외의 다른 저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음식의 다양한 맛을
비유로 들고 또 역사의 보완이란 측면에서 사례를 들어 문학의 다양한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의 후반부에서 문학의 효용을
권계와 역사의 보완이라는 측면 외에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특징이다.
2. 장자(墻茨)와 순분(鶉奔)
: 〈장유자(墻有茨)〉의 준말로, 《시경》 〈용풍(鄘風)〉에 나온다. 〈모시 서(毛詩序)〉에 “〈장유자〉는 위(衛)나라 사람들이
윗사람을 풍자한 시이다. 공자 완(頑)이 군주의 어머니와 간통하니 국인(國人)들이 이를 미워하였으나 입에 올려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군주의 어머니는 바로 〈순지분분(鶉之奔奔)〉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선강(宣姜)을 말한다. 순분(鶉奔)은 〈순지분분(鶉之奔奔)〉의 준말로, 《시경》 〈용풍〉에 나온다. 〈모시 서〉에 “〈순지분분〉은 위나라 선강을 풍자한 시이니, 위나라 사람은 선강을 메추리나 까치만도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3. 제해(齊諧):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제해는 지괴자(志怪者)이다.”라고 하고 붕새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재해’가 인명인지 지명인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논란이 있다. 문맥을 살펴 여기서는 서명으로 번역하였다.
-성현(成俔, 1439~1504), '촌중비어서〔村中鄙語序〕' , 허백당집(虛白堂集)/ 허백당문집 제7권 / 서(序)-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태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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