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다 대고 말하는 까닭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李資玄, 1061∼1125)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咏嘆, 노래나 시를 지어 탄식함)했으며, 열경(悅卿, 김시습)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 상진(尙震,1493 ~1564) 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公)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 공이 한참 구경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 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 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 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 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이하생략)
-윤휴(尹鐫 1617~1680), '풍악록(楓岳錄)'중에서, 『백호전서(白湖全書) 제34권/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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