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수창기(睡窓記): 잠자는 창

허자는 몹시 가난하여 튼튼하고 조용한 집이 없다. 대신에 골목에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겨우 갖고 있다. 집은 사방이 한 길쯤 되는 넓이지만 허자는 겨우 칠 척 단신에 불과하므로 방에서 발을 뻗더라도 남는 공간이 있다. 이보다 넓어 비록 천만 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창 안으로는 먼지가 들어오지 않고 서책이 죽 꽂혀 있어 마음은 즐겁고 기분은 쾌적하다. 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상쾌한가!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허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설사 안다 해도 그가 간여할 일이란 없다. 따라서 잠을 잔다는 핑계를 대고 창 안에 숨어서 ‘잠자는 창(睡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으로는 오직 가끔 찾아오는 희황상인(羲皇上人,복희씨 이전의 오랜 옛적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을 잊고 한가하고 태평하게 숨어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가환잠자는 창(睡窓記)', 《시문초(詩文艸)》/ 안대회 번역-


▲번역글출처:《고전산문산책》(안대회 지음,, 휴머니스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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