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비록 초라하게 살지라도 / 이가환

만약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것(是, 여기에선 '상황' '처지'를 특정하고 있음, '거시기')’을 능히 즐길 수 있다면, 비록 달팽이집처럼 작고 누추한 집에 살고, 새끼줄 띠를 두른 허름한 옷을 입고, 부스러기 쌀 하나 들어있지 않은 초라한 나물국을 먹더라도 모두 다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히  ‘이것(是)’을 즐길 수 없다면, 무기고와 같은 넓은 터에 튼튼하게 벽을 쌓아  큰 집을 짓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날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먹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비록 두어 칸 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이라도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면 족하고, 비록 삼베와 갈포로 만든 옷일지라도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으면 족하며, 비록 거칠고 꺼끌꺼끌한 밥일망정 아침을 먹을 수 있으면 족하다고 여긴다. 이렇듯 ‘이것(是)’을 즐길 수 있는 이 집의 주인은 훌륭하다. 

하지만 ‘이것(是)’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릇 내가 현실에서 처하는 모든 상황과 처지와 거처가 모두 ‘이것(是)’이다. 지금 집 주인이 마침 곤궁함에 처해 있어서 ‘이것(是)’을 즐김은 마땅히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하루 아침에 편안하게 살게 된다면, ‘이것(是)’을 즐긴다는 것이 어찌 옳다하겠는가? 

내가 '낙시려(樂是廬, 오두막의 이름)'의 주인에게 이른바 ‘이것(是)’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러니 한갓 거처하는 곳만을 가지고 ‘이것(是)’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 '낙시려기(樂是廬記)'. 「금대집(錦帶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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