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문설(文說): 옛 것을 본받되 답습하지 않고 내 것을 이룬다
객(客)이 허자(許子)에게 물어왔다. “당세에서 고문(古文)에 능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를 최고로 친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이 비록 넓고 커서 한량이 없는 것 같지만 대체로 상용(常用)의 말을 사용하여 글이 붙고 글자가 순탄하고,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해득하는 자나 해득하지 못하는 자를 막론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고문을 전공하는 사람이 과연 이와 같은가?”
내가 대답하였다. “이런 것이 바로 고문이다. 그대는 우하(虞夏)의 전모(典謨)와 상(商)의 훈(訓)과 주(周)의 삼서(三誓)ㆍ무성(武成)ㆍ홍범(洪範) 등의 글을 보아라. 모두가 글로서는 극치이지만 여기에 장구(章句)에 갈고리를 달고 가시를 붙여 어려운 말로써 공교롭게 꾸민 곳이 있던가. 공자가 ‘문사(文辭)는 의사를 전달할 따름이다.’ 하였다. 옛날에는 글로써 군신 상하의 의사를 소통하고 글로써 그 도(道)를 실어 전하였던 까닭에, 명백(明白)ㆍ정대(正大)하고 순절(諄切)ㆍ정녕(丁寧)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분명하게 그 가리키고 뜻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글의 효용(效用)이다.
삼대(三代)의 육경(六經) 및 성인의 글과 황노(黃老 황제(黃帝)와 노자(老子). 전하여 도가서(道家書)를 가리킴)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에 있어서는 모두 그들의 도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알기가 쉽고 저절로 고아(古雅)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서는 글과 도가 두 갈래로 분리되어 비로소 장을 끌어오고 구를 따내고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공교롭게 꾸미는 일이 생겨났으니 이것은 글의 화액(禍厄)이지, 극치가 아니다. 내가 비록 노둔하지만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사는 의사의 전달을 위주로 하여 평이하게 지을 뿐이다.”
객이 또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좌씨(左氏)ㆍ장자(莊子)ㆍ사마천(司馬遷)ㆍ반고(班固) 및 근대의 한창려(韓昌黎 창려는 한유(韓愈)의 봉호)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을 보았는가? 그들의 글이 일상 용어만 사용했었던가. 더구나 그대의 글은 옛것을 본받지 않고 도도(滔滔 끊이지 아니함)하고 망망(莽莽 무성함)한 것을 일삼으니 자만한 데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내가 말하였다. “그 몇 분의 글 또한 상용어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보건대, 비록 간결한 듯도 하고 웅혼한 듯도 하며, 심오한 듯도 하고 분방(奔放)한 듯도 하고 굳세고 기이한 듯도 하지만, 대체로 그 당시의 상용어를 가지고 바꾸어서 고상하게 만든 것이니, 참으로 쇳덩이를 달구어서 황금을 만들었다고 이를 수 있다. 후세 사람이 오늘날의 글을 볼 적에 어찌 오늘날 사람이 그 옛날 몇 분들의 글을 보는 경우와 같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하물며 도도 망망하게 한 것은 진정 웅대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옛것을 본받지 아니 한 것 또한 나름대로 우뚝 솟고자 한 것인데 무슨 자만이 있겠는가?
그대는 그들 몇 분을 자세히 보았는가? 좌씨는 스스로 좌씨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ㆍ반고는 스스로 사마천ㆍ반고이고,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 역시 스스로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이어서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을 배웠으면 하는 것이고, 지붕 밑에 거듭 지붕을 얹듯이 남의 문장을 답습하여, 표절했다는 꾸지람을 받을까 부끄러워한다.”
객이 말하였다. “그대의 글이 평이하고 유창하니 이른바 법고(法古 옛것을 본받음)라는 것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내가 대답하였다. “그야 당연히 편법(篇法)ㆍ장법(章法)ㆍ자법(字法)에서 구할 것이다. 편(篇)에는 한 뜻으로 곧바로 내려간 것도 있고, 혹은 서로 걸어서 연결하여 여닫는 것도 있고, 혹은 마디마디 정감을 내보이는 것도 있고, 혹은 늘어놓다가 냉정한 말로 끝을 맺는 것도 있고, 혹은 자세하고 번잡하면서도 법칙이 있는 것도 있다.
장(章)에는 조리가 정연하여 헝크러지지 않는 것도 있고, 뒤섞이되 잡되지 않은 것도 있고, 끊어진 듯하되 앞을 잇고 뒤를 동여맨 것도 있고, 극히 지리한 것도 있고, 극히 짧은 것도 있고, 말을 끝내지 않는 것도 있다. 자(字)에는 울리는 곳, 돌리는 곳, 잠복하는 곳, 수습하는 곳, 거듭하되 어지럽지 않는 곳, 강하되 억지로 하지 않는 곳, 끌어당기되 힘을 부리지 않는 곳, 열고 닫는 곳, 부르고 소리치는 곳이 있다. 자(字)가 밝지 못하면 구(句)가 고상하지 못하고, 장(章)이 안정되지 못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편(篇)을 이룰 수 있다.
내 글은 단지 이것을 깨달은 것일 뿐이며, 고문(古文) 또한 이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이른바 글을 이해하는 사람도 반드시 이것을 엿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객이 말하였다. “훌륭하다. 내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구려.”
-허균(許筠, 1569~1618) ,'문설(文說)',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제12권/ 문부(文部) 9 /설(說)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승운 (역) ┃ 1983
좋은 글은 좋은 생각에서 나온다. 머리 속에 든 것이 없고, 가슴으로 느낀 것이 없는데, 현란한 수사만 늘어놓는다고 글이 좋아질 까닭이 없다. 뿌리 없는 가지와 잎새는 금새 마른다.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것은 뿌리가 그만큼 튼튼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나무가 보기 좋은 것은 뿌리 때문이지, 가지와 잎새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도 알찬 내용이 없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지나친 수사는 항상 내용을 간섭하고 방해한다. 지금 글 쓰는 사람의 폐단이 세 가지가 있다. 화려하게 꾸미기를 힘쓰는 자는 옛 사람이 이미 했던 말을 가져다가 뜻은 따르면서 글자를 바꾸어 화려한 수식으로 이를 꾸민다. 이는 썩은 가죽에 무늬를 얹고 마른 백골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언뜻 보면 화려하여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고상하고 옛스러우려고 애쓰는 자는 얼굴과 생김새, 의관과 옷과 신발이 왕왕 옛 사람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성정(性情)과 신채(神采,정신과 신체)는 함께 하지 않는다. 이것은 흙으로 빚은 인형의 비슷함일 뿐이다. 글이 순순하고 쉬운 것만을 힘쓰는 자는 흙이나 거름, 기왓장이나 벽돌 따위를 죄다 거둬들여 가리지 않는다. 조악하고 탁하고 더럽고 지저분해서 도무지 봐줄 수가 없다. 오직 뜻을 안에서 운용하고, 문사가 겉으로 창달하며, 법은 옛날에서 취해 오더라도 말은 자기가 만들어, 평탄하여 구차하거나 어렵지 않으며, 우뚝하여 절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 이런 것을 일러 진문장(眞文章)이라 한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산보고문집성서문(刪補古文集成序)」중에서/정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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