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답함 / 허균
갓을 쓴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해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힐문하였다. "그대는 문장을 지녔고 벼슬은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높은 지위에 걸맞는 관과 넓은 띠를 하고 임금님을 모실 적에는, 큰 길에 나서면 종자들이 구름처럼 옹위하여 뭇 행인들을 호령하며 앞길을 정리(呵導)했다. 공적인 사귐에 있어서는 지위에 걸맞게 당연히 공경 재상과 한 무리가 되어 서로 어울려 나라 위한 모의(謀議)를 함께 하였다.
이럴진대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서열과 단계를 뛰어 넘어 권력을 붙잡고 일신에 호화로운 생활 누릴 수 있었건만, 어찌하여 조회만 마치면 입 다물고 바보처럼 하고 다니는가?세상 이치에 밝고 명성있는 현명한 사람은 자네를 찾아 오는 일은 없고, 천박하고 기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느니 어찌된 일인가.
게중엔 얼굴 검은 이도 있고 수염 붉은 이도 있다. 수염 붉은 이는 농담에 익살을 부리고, 얼굴 검은 이는 허리에 술병을 차고 있다. 키 작은 한 사내는 마치 여우 같은 코를 하고 있다. 애꾸 눈도 있고 눈썹이 붉은 이도 보인다. 날마다 이런 자들과 어울려 마루에서 떠들며 큰 소리로 노래부르고 만상을 아로새기면서 이것으로 자위하는 듯하다. 이러니 자네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 즐비하고, 뭇 선비들이 자네에게서 등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흙탕에 스스로 몸을 던져 허우적 거리는 것이 이와 같다 하겠다. 이럴진대 어찌하여 이들과 사귐을 끊고 세상살이에 중요한 사람들(要路)과 인연을 맺고 인맥을 쌓지않는가? "
나는 말하되 ,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찌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판단하고, 어설프게 함부로 말을 내뱉는가? 내 천성은 내가 잘 안다. 속이 좁아 졸렬하며 엉성하고도 거칠다. 권모할 줄도 모르고, 술수도 부릴 줄 모른다. 아첨 또한 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깐도 참지 못한다. 마음에 없는 남 칭찬에 말과 생각이 미치면 입이 벌써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권문세가에 발을 디디면 발꿈치가 곧 바로 찌근거리고 쑤셔대기 시작한다. 높은 이와 마주 보고 인사할 땐 몸이 절로 뻣뻣해진다. 이같은 오만하고 뻣뻣한 자세로 나아 가서 권세있는 재상을 뵙는다면, 아마도 그는 내가 미워서 목이라도 자르고 싶어할 것이다. 이런 천성에 훌훌 다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벼슬을 떠나 강호로 가버릴까 생각하지만, 가난하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어찌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주저한다.
세속에 구애됨이 없고 지위와 권세와 이익과 가식과 체면에 연연하지 않는 오직 저 두세 사람의 벗들은, 내가 가진 재주 좋아하고 혹은 나의 소탈함 좋아하여 나를 찾아주니, 더불어 내 술에 취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탄없이 어울린다. 저 사람이 글을 읊으면 이 사람이 화답하는데, 우러나오는 글편마다 구슬이요, 화제요, 목난이며 매괴요 산호다. (※화제, 목난, 매괴는 진귀한 보석의 이름).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이것이 어찌 보물이 아니라 하겠는가? 내 보물 스스로 귀히 여겨 남에게 팔리길 기대하지 않는다. 풍과 송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나와 마음과 뜻을 더불어 나누는 벗이요. 명소(命騷)는 나의 노복(늙은 하인)이다.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마치 큰 사업인양 절로 어깨가 으쓱거리게 되고, 온 천하를 시더워하고 하찮게 본다.
벼슬할 땐, 권모술수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하늘이 내게 주신 성정를 그대로 따라서 늘그막에 이르렀다. 세상의 이익(勢利)으로 사귄 친구는 반드시 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귐은 변하지 않으니 돌인가 무쇠인가? 마음이 만족할 때면 기쁘고 즐거워서 나의 존재 조차 망각하고, 때론 침식마저 잊는다. 이때에 고관(高官)의 지위 따위야 어디 안중에나 있을 건가? 저 부귀한 사람들은 자색 청색 인끈에다 긴 옷자락에 옥을 차고 부귀와 지위와 권세를 과시하며 아녀자나 즐겁게 할 뿐이지만, 우리 같은 적막한 사람은 오직 우리의 낙만을 즐기며 성색을 탐하지 않고 엄벌도 무서워 않는다.
도잠(陶潛)과 사영운(謝靈運)이며 이백(李白)과 소식(蘇軾)이라. 나는 이들과 같아지길 바랄 뿐이요. 일신의 부귀외 영달과 흥망 성쇠(盛衰)는 하찮게 여겨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즐기고 부러워하는 것은 나는 싫다. 뭇 사람들이 높이고 귀히 여기는 것은 나는 더러워한다. 마음에 바람이 들어 병들었다고 남들은 비웃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사는 것이 좋다.
이러하니 내 일신이 번번히 고발당하여 중한 죄(罪)에 얽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귐 끊는다면, 이 몸 차라리 처형되는 것이 낫다. 세상 인심은 날카롭게 번득이고 세상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털끝을 나누어 쪼개고 셈하고, 이익과 손해에는 한치 눈금을 따진다. 이러한 자들과 내 마음이 맞지 않을진대, 어찌 진실되게 마음을 맞춰주며 그들을 믿고 더불어 어울릴 수 있겠는가? 그대 말이 옳은 면도 있다. 하지만 세속의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했고, 나의 민낯과 미련한 속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비록 그대가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겉사람을 보고 세속의 기준을 따르는 그게 어찌 성실한 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자 힐자는 말하되, "알겠소. 내가 진정 모호하고 섣부르기 그지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대의 논설을 듣고 나니, 마치 큰 무당을 본 것 같다. 그대 사귐 훌륭하고 그대 말이 틀린 것이 없다. 내가 섣부리 판단하고 실언을 하였으니 진정 소인배 부류와 그 무엇이 다르랴" 그가 말을 마치고 물러가니, 걸음걸이 시원스럽다.
-허균(許筠, 1569~1618), '힐자(詰者)에게 대답함(對詰者)',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2권/ 문부(文部) 9 / 잡문(雜文)-
※참조: 원문은 4언(四言) 운문형식의 시(詩)다.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신승운 (역)을 바탕으로 표절하고, 산문형태의 나름의 글로 풀어 재해석하고 윤색하여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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