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참으로 덕(德)이 있어 훌륭한 말을 한다
보내주신 문무순성악사(文武順聖樂辭)와 천보악시(天保樂詩)와 독채염호가사시(讀蔡琰胡笳辭詩)와 이족종(移族從)및 여경주서(與京兆書)를 받았습니다. 막부(幕府)에서 등주(鄧州) 북경(北境)까지의 거리가 모두 500여 리이고, 경자일(庚子日)에 출발하여 갑진일(甲辰日)에 도착하기까지 모두 5일이 걸렸는데, 5일 동안 손으로 피봉을 뜯어 눈으로 보며 입으로 그 시문(詩文)을 읊조리고 마음으로 그 뜻을 생각하노라니, 황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마치 무엇을 잊은 것처럼 황홀하여, 말을 타는 괴로움도 길이 먼 것도 몰랐습니다.
저 골짜기 물은 깊이가 한 자에 지나지 않고, 작은 토산(土山)은 높이가 한 길도 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가벼이 여겨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다가 태산(泰山)의 높은 절벽에 오르고 대해(大海)의 거센 파도를 목도함에 미쳐서는 벌벌 떨면서 넋이 나가 정신이 멍해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보이는 광경이 눈앞에서 변하면 심경(心境, 마음의 상태)이 안에서 바뀌는 것은 이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각하(閤下)께서는 지니신 탁월한 재능과 쌓으신 웅대(雄大)하고 강건(剛健)한 대덕(大德, 넓고 큰 인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끝이 없으시며, 또 고귀(高貴)함은 상공(公相, 公卿)에 이르고, 위엄(威嚴)은 관할지역(管轄地域)에 진동하니, 천자(天子)의 보좌(輔佐)이고 제후(諸侯)의 사표(師表)이십니다.
그러므로 합하의 문장과 언론이 사적(事績, 행하여 이룬 일의 실적)과 서로 부합하여, 진동하는 위엄이 천둥처럼 맹렬하고 은하(銀河)처럼 광대하며, 순정(純正)한 악성(樂聲)은 소호(韶濩, 은나라 탕왕시대의 음악)와 어울리고 강건(剛健)한 기개(氣槪)는 금석(金石, 쇠붙이)이 기운을 잃게 하며, 문사(文辭)가 풍부하되 필요 없는 말이 한마디도 없고(豐而不餘一言), 간략하되 놓친 말이 한마디도 없으며(約而不失一辭), 거론하신 일은 신뢰(信賴)할 수 있고 말씀하신 도리는 합당하셨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덕(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고 하셨는데, 각하(閤下)야말로 참으로 덕이 있어서 훌륭한 말을 하셨다고 하겠습니다. 양자운(揚子雲)이 “상서〈商書〉는 호호(灝灝, 뜻이 광대함)하고, 주서〈周書〉는 악악(噩噩 논조가 엄숙하고 매우 간절하고도 정직함)하다.”고 하였는데, 합하의 문장이야말로 참으로 호호(灝灝)하고도 악악(噩噩)하다 하겠습니다.
옛날에 제군(齊君, 제나라 환공)이 행군(行軍)하다가 길을 잃자 관자(管子, 관중 管仲)가 늙은 말을 풀어놓고서 그 말을 따라가기를 청하였고, 번지(樊遲)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孔子)는 늙은 농부에게 묻게 하셨습니다.
저 늙은 말의 지혜가 이오(夷吾, 관중)보다 현능(賢能, 어질고 재능있음)하지 못하고, 늙은 농부의 재능이 이부(尼父, 공자를 높여 부르는 말)보다 명철(明哲)하지 못한데도, 관자와 공자가 이와 같이 한 것은 성인과 현인은 재능이 다양하고 노농(老農, 늙은 농부)과 노마(老馬, 늙은 말)는 지혜가 전일(마음과 힘을 모아 오직 한 곳에만 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옮긴이 주: 위의 글 마지막 문장, '農馬之知專故也', 즉 늙은 농부와 늙은 말이 가진 지혜는 삶의 경험으로 체휼한 지혜, 다시말해 오로지 한 곳에만 오래도록 힘과 마음을 다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배인 익숙함을 통해 절로 우러 나오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지금 저는 비록 어리석고 비천하지만 문학에 종사한 것이 전일하고도 오래되었으니, 왕공(王公)의 재능을 찬양하고 대군자(大君子)의 미덕을 칭송하여도 분수를 넘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드리는 바이니 자세히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자주
1. 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鄧州北寄上襄陽于相公書) : 당 헌종(唐 憲宗) 원화(元和) 원년(806) 6월에 한유(韓愈)는 강릉법조참군(江陵法曹參軍)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들어와서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제수되었다. 한유가 돌아오는 길에 양양(襄陽)을 지나니, 산남 절도사 우적(山南節度使 于頔)이 한유를 환대하고 자기가 지은 시문(詩文)을 보여주었다. 한유는 이 시문을 받아 가지고 오다가 등주(鄧州) 북쪽에 이르러 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우적이 이때 새로 평장사(平章事, 재상의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상공(相公)’이라 한 것이다.
-한유(韓愈, 768~824), '등주(鄧州) 북쪽에서 양양(襄陽)우상공(于相公)에게 올린 편지(鄧州北寄上襄陽于相公書)',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卷2 서(書) 04』-
▲원글출처: 전통문화연구회/동양고전종합DB(http://db.cyberseodang.or.kr)
“무릇 일에는 성실(誠實)함보다 더한 것이 없다. 말은 의사(意思, 뜻과 생각)를 전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을 화려하게 하기 위해 번거롭게 수고할 필요가 없다."-공자(논어주소)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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