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대추나무 가시끝에 조각하기 / 한비자

어떤 송나라 사람이 연왕에게 찾아와 간청하기를, 대추나무의 가시 끝에 암컷 원숭이를 조각하여 연왕에게 바치겠노라 하였다. 다만 나무 가시끝에 조각된 원숭이를 볼려면, 3개월 동안 목욕재계를 해야  볼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연왕은 나무 가시끝에 조각된 원숭이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연왕은 그에게 3승의 땅*을 하사하였다. 연왕을 가까이서 섬기는 궁궐의 대장장이가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군주가 열흘 동안이나 목욕 재계하며 연회를 열지 않은 일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왕께 장담한 그 송나라 사람이 3개월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는 기한을 정한 까닭은,  임금님께서 그토록 오랫 동안 재계하면서까지 쓸모 없는 물건을 구경할 생각은 못할 것이라 미리 짐작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조각하고 깍는 칼은 조각물보다 반드시 작아야 합니다. 지금 신하인 제가  대장장이인데도 그보다 작은 칼을 만들지 못합니다. 가시끝보다 작은 조각칼이 있을리 만무한데, 나무의 가시 끝에 원숭이를 조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왕께서 한번 조사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왕이 그 송나라 사람을 불러들여 조사한 결과 대장장이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왕은 그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후에 왕의 대장장이는 또 말하기를, “계획하는 일에 당면하여 그것이 적절하고 합당한가를 따지고 헤아려 검증할만한 올바른 도량(度量)이 없다면, 마치 '대추나무의 가시'에 조각한다는 것처럼 허황된 말 장난으로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연나라 왕은 정교하게 세공한 예술적인 장식물을 좋아했다. 어느 날 위나라 사람이 연왕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나무의 가시 끝에 암원숭이를 조각할 수 있습니다.”  연왕은 그 사람의 재능에 혹하여 그에게 5승의 녹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무 가시 끝에 암원숭이를 조각한 것을 꼭 보고 싶다.”하였다.  그러자 위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그것을 꼭 보고 싶으시면, 적어도 반년 동안은 후궁들의 방에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또 그 기간 동안 음주가무와 육식을 삼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비가 그치고 햇볕이 쨍쨍 날 때에 그늘에서 보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무의 가시 끝에 조각된 암원숭이가 반드시 임금님의 눈에 보일 것입니다.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그러나 끝내 연왕은 암원숭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대장간 영감이 연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저는 끌을 만드는 대장장이입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끌로 파기 마련입니다. 또 깎아내고 다듬는 조각품은 당연히 끌보다 큽니다. 이치가 이럴진대 가시 나무의 가시 끝에 끌질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왕께서는 시험삼아 그 사람이 사용하는 연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면 제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에 수긍하여 위나라 사람을 불러 물었다.  “네가 가시 끝에 조각을 하는 데 쓰는 연장은 어떤 것이냐?”  위나라 사람이 대답했다. “끌로 합니다.” 이에 왕이 요구하기를, “그 끌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위나라 사람은, '숙소에 가서 가지고 오겠다'고 대답하고는, 그 길로 달아나버렸다. (외저설)

제나라 선왕은 연주 음악을 좋아했다. 특히 합주를 좋아해서 항상 300명의 악사들이 합주하게 했다. 성밖 남쪽에 살고 있는 풍각쟁이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너도 나도 왕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선왕이 기뻐하며 쌀을 주어 초청을 하자, 악사 수 백 명이 떼지어 모여 들었다. 세월이 흘러 선왕의 뒤를 이어 민왕이 군주가 되었는데, 제 민왕은 독주를 좋아했다. 그러자 악기를 연주하던 자들이 대부분 도망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엉터리가 많았던 까닭이다. 일설에 의하면 한나라의 소후가 이렇게 말했다. “피리를 부는 자는 많은데 누가 잘 부는지 알 수 없구나.”  그러자 전엄이 말했다. “한 사람씩 피리를 불도록 시켜보십시오.”(내저설)

제나라 왕의 식객들 중에 왕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어느 날 왕이 화가에게 묻기를, "그림 중에서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화가가 대답하기를, "개와 말이 그리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인가?" 왕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화가가 가로되, " 귀신과 도깨비가 가장 그리기 쉽습니다. 무릇 개와 말은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늘 보고 익숙하게 아는 것이라, 비슷하게 그릴지라도 금새 실물과 비교되어 잘못된 것을 쉽게 알아차립니다.  때문에 가능하면 실물 그대로 그려야만 하니 그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어 그 실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상하는대로 맘대로 그려도 실체와 대조할 방법이나 근거가 없으니, 그리기가 가장 쉽습니다."(외저설)

-한비자(韓非子)

※[옮긴이 주] 3승(乘)의 땅: 1승(乘)은 4마리 말이 이끄는 전차 1대를 말한다. 춘추시대의 전차는 전투부대의 기본단위다. 전차 1승에 배속되는 군사는 서주(西周)시대 초기에는 25인, 이후에는 점차 증가하여 춘추시대 말에는 100인으로 증원되었다. 3승의 땅이란 전차 3대 분량의 병력을 능히 거느릴 수 있는 땅이라는 말이 되겠다. 전차 1승을 보유할 수 있는 땅의 면적은 사방 6~8 리, 300호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땅이다. 당시의 척도로 1리는 360보, 대략 560m. 즉 3승의 땅은 사방 3~4km 넓이의 땅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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