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잘못된 헤아림을 경계한다 / 최한기
얕은 소견과 좁은 도량, 어리석은 문견과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먼저 애증(愛憎)을 마음에 두고 고집을
일삼는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옛 법에 집착(執着)하고 방술(方術)에 빠진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자신을 믿어서
능력을 과시하며 말이 요사스럽고 허탄(虛誕)한 자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조급한 마음과 혼미(昏迷)한 견해를 가지고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고, 일을 행함이 미숙하거나 얼굴을 접함이 오래지 않으면 사람을 헤아릴 수 없다.
분수(分數)가 없고 준적(準的)이 없는 것은 처사(處事, 일을 처리함)의 선악을 측량할 수 없다. 자기 습관에 매여서 인물(人物)에 해를 끼침을 돌아보지 않고 욕심에 끌리어 윤상(倫常, 마땅이 지켜야할 상식으로써의 인간됨의 도리와 윤리)을 침범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면, 제 이익만을 위한 것이 마침내 자신을 해치게 되고, 이른바 일을 이루었다는 것도 모두 미진(未盡, 다 채우지 못해 부족함)함이 많다. 소경은 간혹 문을 바로 찾을 때가 있지만, 귀머거리야 어찌 선한 말을 알아듣겠는가. 측인(測人,사람을 헤아림)하는 도리는 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헤아려야 한다.
남의
집을 빼앗기를 꾀하는 자는 그 집에 빼앗기 어려운 사람이 있음을 꺼리고, 남의 재물을 빼앗기를 꾀하는 자는 그 지키는 이 가운데
빼앗기 어려운 사람이 있음을 꺼린다. 도적이 헤아리는 것은 단지 빼앗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헤아릴 뿐 그 사리(事理)의
선악은 헤아리지 않아, 뺏을 수만 있다면 못할 짓이 없고 뺏을 수 없으면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리듯이 하여 협박과 행패를 마구
부린다. 법을 맡은 사람은 이 같은 악을 가장 미워하여 혹독한 형벌과 엄한 문책이 여항(閭巷,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 즉 사회)의
이목(耳目)에까지 이르고 사람들의 속으로 하는 질책과 욕이 끊어지지 않아 멀고 가까운 곳에 끊임없이 전파된다. 비록 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그 뒤에서 노리는 다른 도적이 없을 줄 어찌 알며, 비록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전에 알몸만 남게 될 근심이
없을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처음 잘못 헤아린 것 때문에 마침내 남에게 도륙(屠戮, 무참하게 마구 죽임)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는 천지의 패악한 기운이 모여 생긴 것이라, 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의 흉패(凶悖, 험상궂고 패악함)한 무리가 좋은 전감(前鑑 앞의 일을 거울삼아 현재의 상황을 비쳐 보는 일)으로
되어 있는데도 이 사람의 귀에는 일찍이 들리지 않았고, 방금 도적의 말로가 전철(前轍)로 되어 있는데도 이 사람의 눈에는 일찍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목의 헤아림이 이같이 막혔으니, 그의 헤아림은 다만 남의 집을 빼앗고 남의 재물을 빼앗아 부자가 되어
보려는 것일 뿐 딴 생각은 없는 것이다.
-최한기(崔漢綺1803-1879), 인정(人政)제1권 / 측인문 1(測人門一) - 총론(總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기석 (역) | 1980
※[옮긴이 주]
혜강 선생의 철학에서 '추측(推測)과 검증(證) play중'은 핵심적인 개념이다. 혜강선생의 철학에서 '추측'의 의미는, '이미 알려져 있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헤아려 검증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일반적으로 추측(推測)의 사전적 정의는, "① 미루어 생각하여 헤아림. ② <언어> 미래의 일에 대한 상상이나, 과거나 현재의 일에 대한 불확실한 판단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나와있다. 혜강선생의 추측은, 사전적 정의에서 "미루어 생각하여 헤아림"의 뜻에 해당된다. 일상에서
보통, 추측은 불확실한 판단을 의미하는 '짐작'과 다름없이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 말 '미루다'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써 다른
것을 비추어 헤아리다."라는 뜻이다. 즉 근거를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미루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갖고 임하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관찰'이다. 이는 대충 어림짐작하여 뜬 구름을 잡는다거나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 것 등과는 전혀 다르다. 혜강 선생의 철학에서 핵심개념인 ‘추(推)·측(測)·증(證)은, 과학적 사고의 바탕이 되는 ‘관찰·가설·검증’과 비교된다. 그래서 현대의 연구자들이, 혜강선생의 철학을 경험주의 혹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이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혹자는 더 나아가 관념적 차원의 도덕이나 윤리의 개념을 실증적 논리로 그 실재를 입증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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