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4가지 단서 / 최한기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단서는 한 가지가 아니다. 크게는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상벌(賞罰)이 거꾸로 시행되는 것이고, 다음은 풍속이 무너져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음은 남을 이기려는 마음으로 시샘을 해서 파벌(派閥)을 지어 서로 헐뜯는 것이고, 다음은 사물에 정신을 빼앗겨 게을러져서 기풍을 진작시키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운화(運化)의 대본(大本)을 알고 행사(行事, 일을 행하고 실천함)와 성실로 가르침을 삼아 이 네 가지의 장해가 없어지게 된다면, 어찌 가르침이 밝아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천인(天人)의 도리를 수행(修行)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이러한 가르침이 없더라도 그 본뜻을 살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미 법도(法度)있는 가르침을 받아서 행동이 법도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겠는가.

모르면 그만이지만, 안다면 이 가르침 이외에는 다시 바꿀 수 없는 인도(人道)의 가르침은 없다. 나라의 임금이 이것을 모르면 정교(政敎)가 문란하여지고, 대부(大夫)가 이것을 모르면 풍속이 무너지고, 학도(學徒)가 이것을 모르면 남을 이기려고 헐뜯고, 서민이 이것을 모르면 사물에 정신을 빼앗겨 게으르게 된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르침을 베풀어서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 허무와 화복(禍福)의 가르침과 귀신과 방술(方術)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 근본을 알아 잘못을 변혁한다면 거의 정대(正大)한 가르침으로 들어올 수 있으나, 근본을 알지 못하면 더욱 침혹되어 도리어 정대한 가르침을 나무라고 비웃게 된다.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것에 어찌 모르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대개 알지 못하는 병통(病痛)은 주로 자질이 혼탁한 데서 말미암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모르는 것으로 자처(自處)한다면 오히려 큰 해(害)가 되기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객기(客氣)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은 참으로 곤란하다.

그러나 천하에 어찌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근본을 말하면 모두 모르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운화(運化)의 가르침에 의해서 점차 방향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분비(憤悱 은 마음으로 통하기를 구하지만 아직 통하지 못하는 것. 비는 입으로 말하고자 하지만 아직 표현하지 못하는 것(역자 주))하여 앎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바로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기회이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7),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것(妨碍於敎)', 인정(人政) 제8권/교인문 1 (敎人門)-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홍혁기 이광호 (공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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