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차라리 스스로 잊는 것이 낫다 / 이익
사람이 친애하는 것을 가깝다고 하고, 가깝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소원하다고 하는데, 소원함이 심해지면 더러 저버려 절교하고 아예
생각지 않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렇게 된 자는 무릇 좋고 나쁨, 근심과 즐거움이 있어도 아득히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마치 마비된 몸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나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귀는 벗인 윤 상사(尹上舍) 모씨가 자신의 당(堂)에 양기(兩棄)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그 뜻은 “세상의 서로 친하고 편드는
이들은 부귀와 영화를 위하는 데 불과하니, 분주히 다니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사사로운 이익이 관련되면 절절하여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비록 빈틈없이 결속한 듯이 보이지만, 그 마음은 단 하루도 이반(離反, 사이가 벌어져 서로 등을 돌리고 배반함)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다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반하지
않는 바는 밖에 있고 이반하는 바는 안에 있으니,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 세상이 이미 나를
버렸고 나도 세상을 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치 거문고 줄이 끊어지고 느슨한 활이 뒤집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차라리
스스로 지조를 지킬지언정 망녕되이 구하지 않고, 차라리 가벼이 끊을지언정 구차히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마치 다시는
세상에 바람이 없는 자인 듯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공의 뜻이 진실로 고상하긴 하지만 호(號)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 군자가 세상에 있어서 진실로 멀리 피하는 데에 과감하고자
한다면 또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저쪽은 버려도 이쪽은 버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한쪽은 옳은 것이 되지만, 이쪽저쪽 모두가
버린다면 둘 다 그릇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째서인가? 성인은 중국(中國)을 자기 한 몸처럼 여기고 참았으니 모든 것이 자기 몸이 아님이 없는데, 몸을 버릴 수 있겠는가. 남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내 마음은 그만둔 적이 없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조수(鳥獸, 날짐승과 들짐승)와 함께 살 수 없을진댄 그 함께해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그때 세상이 성인을 대우함이 이미 박하였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였으니, 어찌 일시동인(一視同仁,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보고 똑같이 사랑함)하는 성인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
백성은 삼대(三代) 시대에 떳떳한 천성을 지키던 백성이니 공경을 잃지 않고 사귐에 예가 있으면 천하가 진정을 함께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먼저 스스로 혐의하여 나의 마음속에 벽을 만들어 놓은 뒤에야 대책을 얻었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공의 뜻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자세히 해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버린다는
말은 잊는다는 것이요, 잊는다는 것은 곧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서 얽매인 바가 없는 것이다. 인정(人情)을 겪어 보고 세상일을
경험해 보면 대개 잊지 못하는 자가 많다. 처음 들어갈 때는 아교로 붙인 듯 찰싹 달라붙었다가 종당(일의 마지막)에
나갈 때는 얼음과 숯처럼 원수가 된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 해쳐 눈자위가 찢어지도록 흘겨보고 성을 내며 입에 거품을 물고 화를
낸다. 가슴이 막히고 억장에 걸려 있으면서도 혹 그가 떠날까 두려워하니, 이는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잘못이다. 어찌 그리
지나친가.
내가 상대로 하여금 나를 잊지 못하게 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내가 스스로 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잊으면 일이 그치고, 일이 그치면 마음이 고요하며, 마음이 고요하면 이치를 얻게
되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는 도리 또한 항상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즉, 버리지 않는 것은 버림이 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해치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으니 어찌 선(善)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이는 둘 다 버려서 유감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을 돌려서 이 남은 뜻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한 편의 〈무명공전(無名公傳)〉*이 있으니, 이로써 가르침을 받들 수
있을 것이다. 공의 생각은 어떠한가?
※[옮긴이 주]
1.무명공전(無名公傳) : 무명공전(無名公傳)은 송나라의 학자·사상가인 소옹(邵雍, 소강절邵康節)이 지은 〈무명공전서(無名公傳序)〉를 가리킨다. 여기서 무명(無名)이란 인위를
배격하는 무위(無爲)와 비슷한 개념을 지닌다. 무명은 세상의 인위와 명리, 차별이 사물에 붙인 이름 때문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오직 천명과 분수에 따를 뿐 헛된 이름(虛名)에 뜻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옹은 자신의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평생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행일치의 아주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삶의 지향을 <무명공전(無名公傳)>에 담은 바 있다. 소옹은 학문과 사상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인덕이 높아 당대의 명망있는 수많은 현인 학자들이 그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이익(李瀷, 1681~1763), '양기당 서문〔兩棄堂序〕', 『성호전집 제52권 / 서(序)』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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