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눈물이 있어도 감히 울지 못하는 심정 / 이익
기축옥사(己丑獄事,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에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조정에서 매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니, 그 아들 율(慄)이 단식(斷食)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때에 자칫하면 연루죄(連累罪)가 파급되므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장사조차 예(禮)대로 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당시에 문사랑(文事郞)이 되었던 까닭으로 그 원통함을 알고서 바야흐로 관(棺) 뚜껑을 덮을 적에 시 한 수를 지어 비밀히 관 속에 넣었는데, 집안사람들도 몰랐던 것이었다. 급기야 그 아들이 장성하자, 천장(遷葬, 유골을 수습하여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하게 되어 관을 열어보니, 세월이 이미 30년이 지났는데도 종이와 먹 빛이 그대로 있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입을 두고도 감히 말을 못하고 / 有口不敢言(유구불감언)
눈물이 있어도 감히 울지 못하네 / 有淚不敢哭(유루불감곡)
베개를 만지되 남이 볼까 무섭고 / 撫枕畏人窺(무침외인규)
소리를 삼키며 몰래 눈물만 삼키네 / 呑聲潛飮泣(탄성잠음읍)
그 누가 날선 칼날을 가지고서 / 誰將快剪刀(수장쾌전도)
굽이굽이 맺힌 간장 잘라내 줄꼬 / 痛割吾心曲 (통할오심곡)
이 말을 듣는 자들은 코끝이 시큰시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시는 처음에 본집(本集) 속에 실렸었는데, 금본(今本)에는 삭제되었으며, 구집(舊集)이 세상에 혹 있는데도 크게 기휘(忌諱, 꺼리거나 두려워 피함) 하는 바가 되었다. 나는 광주(廣州)에 사는 송(宋)가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수장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기록해 냈으니, 세상의 변괴가 이와 같은 것이 허다하다.
-이익(李瀷, 1681~1763), '백사 만인시(白沙挽人詩)' , 『성호사설(星湖僿說) 제30권/시문문(詩文門) 』-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6
※[옮긴이 주] 정언신(鄭彦信, 1527년 ~ 159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1582년 함경도 순찰사를 맡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의 휘하로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명장들을 지휘하였다. 벼슬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에 관련한 자들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의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정여립과 구촌친척(九寸親)이 된다는 이유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 결국 위관을 사퇴하고 우의정 마저 사퇴하고 말았다. 위관의 자리는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던 정철이 대신하였다. 정철은 위관이 되자, 정언신이 정여립 일가의 족보에 올라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여립일파로 모함하여, 결국 정언신은 투옥되고 남해에 유배되었다. 정언신은 마지막 유배지인 갑산에서 죽었다. 참고로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여 민간차원에서 왜구토벌에 적극 앞장 선 인물이다. 서인세력의 대표학자인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이이의 사망 후에 동인세력으로 전향하였다. 이 일로 인해 정여립은 서인세력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오랜 역사에 걸쳐 왜구에 시달리던 민초들로부터 호국차원의 대동계가 큰 호응을 얻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점차 황해도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서인 세도가들로부터 역모 집단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정여립은 도피 중에 자결하였다. 이로써 3년여에 걸쳐 문초가 진행되었고, 천여명에 이르는 관련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백여명이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동인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한(恨)은 한국 문화에서 못내 분하고 억울하게 여겨져 마음에 맺힌 것을 말한다. 자의가 아닌 타인이나 천재(天災) 등으로 인해 상실의 감정들이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되어 결정처럼 가슴에 맺히는 정서를 가리킨다. 다른 무언가로 위로를 받아 묻히게 할 수는 있으나, 한을 맺히게 한 근본에게 보상받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한"의 특징이다. 한의 강도는 집단적 윤리 의식이 강하고 방어적인 문화권일수록 더 크고 짙게 나타난다. 한은 신경질적 병에 영향을 줄 수 있으나 병적인 감정은 아니며, 삶의 전반적인 가치관, 습관, 행동 등에 스며들어 생활 양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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