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하는 비법

작문에 관한 일을 물으시면서 그 비법에 대해 알려 줄 것을 요구하는데,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조심스럽지만, "저는 그러한 요청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능력에 관해서는 형이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형과 더불어 이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과연 무엇을 얻었습니까? 이로써 얻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결국 어리석은 제가 형에게 말로 거만을 떤 셈입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작문하는데 어찌 비법이 마땅히 있겠습니까? 많이 읽고 많이 지을 따름입니다. 대개 많이 읽고 많이 지어 보는 것은 옛날에 글을 지었던 자도 누구라도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지어 보고자 하는 자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어리석은 저에게서 거만을 떠는 듯한 말을 재차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형이 육백 리 밖에 있으면서 이것때문에 사람을 시켜 이와 같이 물으시니 그 열성적인 간절함에 제가 거만을 떠는 말로 자칫 방자하게 대답하게 된다면, 형이나 저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일찌기 글을 지을 때 어렵고 난감하여 고민하였던 경험들을 드러내어 형을 위해 모두 털어 놓겠습니다. 생각컨대 현명한 형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지만, 이렇게라도 함으로써 제 진심이 형의 부지런하고 간절한 정성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무릇 글을 지을 때는 먼저 구상(構想, 전체적인 개요와 짜임새, 형식 등을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뜻을 구상하는 데는 앞과 뒤가 있어야 하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도 넓게 또는 좁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앞과 뒤와 구성상의 문제가 대략 생각되고, 선택되면 빨리 쓰되 전후 연결과 의미가 상통하게 하고 쉽게 알수 있게 해야 합니다. 조사(助詞)등과 같이 긴요하지 않은 글자와 저속한 말이나 속어들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바른 의미와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것때문에 가리워 제대로 뜻이 실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구상이 확실하게 된 후에 말을 가다듬는데, 무릇 수사(修辭)라는 것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밀하게 할 따름입니다. 앞의 한 구를 수사할때는 뒤 구절을 생각하지 말 것이며, 앞의 한 글자를 생각할 때는 아래의 글자를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많은 내용을 담은 긴 글이라 할지라도 한 글자마다 선택하는 데 신중히 하기를 짧은 율시(律詩,여덟 구(句)로 이루어지는 한시(漢詩)의 형식)를 지을 때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문장에는 쌍행과 단행이 있으며, 넉자 또는 석자, 또는 다섯 글자로 한 구절를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사를 할 때 쌍행을 마땅히 선택해야 할 곳에 단행을 해서는 안되며, 단행을 선택해야 할 때 쌍행을 선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네 글자로 한 구절을 이루는 것과 세 글자 또는 다섯글자도 그 선택에 있어서 역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내용면에서는 옛 사람의 의견을 가져와서 쓴 것도 있겠고, 자신이 뜻을 만들어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의 의견을 가져 와서 부연할 때는 그 말을 어렵게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음 보는 것처럼 하지 말 것이며, 자신이 뜻을 만들었을 경우에는 그 말을 쉽게 하여 보는 사람으로 의혹(의문)이 없게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뜻과 아울러 그 말까지 취하고자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옛 사람과 옛 책의 이름을 밝혀 내가 한 말과 뒤섞이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진부하고 표절한 것이 됩니다.

내용을 구상할 때는 반드시 주의(主意, 주제가 되는 뜻, 주제)를 선택해야 하고 상대가 되는 뜻 즉 적의(敵意)도 있어야 합니다. 주의를 중심으로 글을 짓되 이와는 별도로 적의로써 한 글을 지어 그것으로 주의를 공격하는데, 주의는 갑옷이 되게 하고, 적의는 칼이 되게 하여 갑옷이 단단하면 칼이 스스로 망가지게 되는데, 여러 번 공격하다가 여러 번 망가지게 되면 주의가 이긴 것이므로 바로 적의를 모아 들어오게 하여 주의를 더욱 높게 밝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혹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또 승패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면 족히 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주의와 아울러 버려야 할 것입니다.

뜻이 확립되고 수사가 되었으면 글이 끝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또 뜻과 말을 모아 그 양(量)을 서로 비교해 문제가 있는가 살펴보아서, 지나치게 긴 것은 짧게 짧은 것은 길게 하며, 소루(小累, 꼼꼼하지 않고 거친 것)한 것은 주밀(周密, 구체적이고 꼼꼼함)하게 주밀한 것은 소루하게 하고, 느슨한 것은 급하게, 급한 것은 느슨하게, 나타난 것은 어둡게, 어두운 것은 나타나게, 허한 것은 실하게, 실한 것은 허하게 하며, 머리는 꼬리를, 꼬리는 머리를 서로 돌아보고 바라보게 하며, 앞에서는 뒤를 부르고, 뒤에서는 앞의 부름에 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은 놓아주고 잡기도 하며, 또 헤아려 보기도 꺾어 보기도 하며, 맺어보기도, 바르게 해보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복잡한 것을 한 가지로 말하기 어려운데, 분명하게 가지가 나지 않게 해야 하며, 적당하게 합당하게 해야 합니다. 

말이 뜻에 합당해야 하며, 뜻도 말에 합당해야 합니다. 말이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말이 비록 교묘하다 할지라도 못쓰게 되며, 뜻이 말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정비가 잘 되었다 할지라도 어지러워 지게 됩니다. 거칠어 못쓰게 된 것은 더욱 다듬어야 하고, 어지럽게 된 것은 더욱 가다듬어야 합니다. 

각 구절마다 공교롭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뜻에 해를 끼치게 되고, 말마다 모두 바르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구절에 누가 될 것입니다. 구절과 뜻이 서로 치유되지 않은 것이 합당한 것이 되며, 합당한 것이 법이 되는데 법이 정해 지면 그 글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스스로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쓰여진 글을 상자 속에 넣어 두고 보지도 말고, 또 그 글을 쓰는 과정에 생각했던 것을 가슴에서 완전히 씻어 마음에 생각이 되지 않게 하며, 하루 밤 혹은 이삼일이 지난 후 다시 내어 보되 이 글에 대한 나의 애정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글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다시 보면 좋은 것은 바로 그 좋은 것이 보일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좋지 않은 점이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좋지 않은 것이 발견되면 버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에 대해서는 옛날 사람들의 글 즉, 당송이나 혹 근세의 유명했던 작가들의 글을 취해 내 글과 같이 뒤섞어 읽어 내가 나의 글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생기게 한 후에 옛 사람들의 글로써 비교해 보면 합당한 것은 바로 그 합당한 것을 발견할 수 있고, 합당하지 않은 것은 즉시 그 합당하지 않은 것은 버리는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 보아도 좋고, 또 옛 사람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 합치된 점이 있을 때 그 글에 대한 내 일이 끝난 것입니다.

무릇 글을 지을 때 생각하는 것이 어려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쓸 때의 어려움과 여러 번 옮겨 쓰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옮겨 쓸 때 반드시 정밀하고 가깝게 해야 하고, 밝은 종이에 해자(楷字)로 쓸 것이며, 구두점(句讀點)은 주묵(朱墨)으로 하여 증감하고 바꾸어야 할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하여 현혹되게 하지 말 것입니다.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천천히 읽어 생각해 보아야 할 곳을 찾아보고 여러 번 반복해서 씹고 삶고 단련하며 끌어들이고 떨어뜨려 보고 흔들고 끌어보아야 하며, 높고 낮게 굽히고 꺾어 선회를 여러 번 반복해 음향이 마디가 있어야 합니다. 보아도 분명하지 않고 음향의 마디가 없으면 옮겨 쓰고 읽을 때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옮겨 쓰고 읽을 때 좋으면서도 마디가 없는 것은 글이 하자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빨리 고쳐야 할 것입니다. 무릇 글을 지을 때 열 번 옮겨 쓰고 열 번 읽어보아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 비로소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넓고 후세는 멀리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나의 글을 알아주는 사람은 적을 것이며, 설령 알아 주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서로 만나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내 마음으로 내 글을 증험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발현(發現)하여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흡족하지 않으면 그것은 뭔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내 마음에 흡족한 것을 구할 것이지 어찌 천하와 후세에까지 구하겠습니까? 천하와 후세에 구하기도 부족한데 하물며 구구하게 한 때의 일시적인 칭찬이나 기대까지 구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내 마음에 흡족하면 내 글에 대한 일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고되고 어려움은 이미 많았습니다. 내 글은 내가 쓰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세상과 가정에서까지 이해가 되지 못해 밖으로는 임금과 공경(公卿) 대부(大夫) 및 당시의 선비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안으로는 집안 사람들과 종들의 빈정거리는 바가 되어 밥을 보고도 입으로써 어떻게 먹어야 할지 막막해지기도 할것입니다. 갓옷의 옷고름으로 옷깃삼아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저와 같은 어리석은 바보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치고 쫓겨 실직되어 근심이 쌓이고 적막해 어찌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형과 같이 된 후에야 가능해 질지도 모릅니다.

내가 글짓는 이 일에 조금 성취가 있으면 다른 일은 모두 폐지하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몸소 다 겪으면서도 다른 일을 피하지 않으며, 모두 폐지하면서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여기에만 힘을 다하는 것 또한 가소롭고 소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소견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대로 지껄이고 의미대로 붓을 휘갈겨도 문장이 되는 것은 그 천재성이 보통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서 그런 것이니, 이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한 비범한 능력과 재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바가 아닙니다. 

형의 고명함이 비록 정성스럽고 남달리 공명 정대하다 할지라도 제게 보여준 글을 자세히 살펴 보면, 위에서 말한 수사(修辭)에 관한 내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재주가 높고 성격이 넓어 완급의 조절이 없이 뜻한 바대로 마음에서 생각나는 대로 거침없이 풀어내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이 어찌 아니라 하겠습니까? 

형은 말하기를 위숙자(魏叔子,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대문장가인 위희(魏禧,1624~1681)로  산문에 관한 이론를 저술했음)와 같은 무지(無知)와는 말할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옛 사람들의 이러한 말도 일리가 없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숙자(叔子)가 이른바 많이 짓는 것이 많이 고치는 것만 못하고 많이 고치는 것이 많이 깎는 것만 못하다고 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오지 않은 비법입니다. 

숙자의 이 말은 문장 공부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진실로 하루에 한 번 고치고 일년에 약간 수(首)씩 짓고, 또 약간 수에서 깎아 약간 수만 두어 이렇게 십년 동안 하면 가히 한 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권이 된 것을 다시 고치지 아니하고 다시 깎지 않는 글이 되면 내 마음에 흡족할 것입니다. 이 한 권으로 십년의 세월과 바꾼 것이 비록 많은 노력에 비해 효과가 적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십년으로 천만세의 긴 세월을 도모한다고 생각하면 매우 후한 이득이 될 것인바 이것은 추구할 필요가 마땅히 있습니다. 요컨대, 실로 이것은 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이 육백리의 먼 길에 온전히 이것때문에 사람을 보내는 열성과 부지런함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감히 가볍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이 잘 헤아려보기를 바랍니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 '답우인논작문서(答友人論作文書)', 명미당집(明美堂集)卷八/ 書-  

**번역문 참조: 『연암 박지원의 글짓는 법(박수밀 역/ 돌베게)』, 『안대회ㆍ이종묵ㆍ정민의 매일 읽는 우리 옛글 27/ 글쓰기의 비법 외/이건창 외(안대회, 이현일역해/민음사)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참조:答友人論作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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