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두 누이에게 주는 교훈 (妹訓)
나에게 두 누이가 있는데 다 비녀(笄) 꽂을 나이가 되었다. 어려서 들은 바가 없으면 장성함에 이르러 경계하기 어려우므로, 이 글을 지어 훈계하는 바이다. 무릇 16장(章)이다.
여자의 덕은 화순(和順 온화하고 순함)으로 규칙을 삼으며, 언어와 걸음걸이로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한 마음으로 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이 그 직분이다.
기운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낮추어 중정(中正)으로써 재제하며 조용히 행동하여 처사와 마음이 서로 부합되어야 이것이 길상(吉祥)이 되어 모든 복이 다 이른다.
비루하고 어긋난 말은 귀를 가리고 듣지 말며 장로(長老)의 훈계는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익히면 몸도 따라서 편안하게 된다.
선한 말이나 악한 말이 다 입에서 나온다. 한 번 악한 말을 내게 되면 후회한들 누구의 탓이랴? 한몸의 선악(善惡)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것이다.
말이 많은 지어미는 행실이 한결같지 못하다. 말이 많으면 망령됨이 많고 망령되면 진실이 없으니, 경계하고 경계하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좋지 않으니라.
말과 웃음에 절제가 없으면 광대[俳優]에 가까우며, 얼굴 표정이 엄숙하고 온화함이 적으면 근심에 싸인 것과 같이 보인다. 무엇을 중도(中道)라 이르는 것인가? 유순(柔順, 부드럽고 순함)에서 구해야 한다.
선을 보면 반드시 실천하고 악을 보면 반드시 징계하며,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지 말고 자신의 능함을 과시하지 말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힘쓰고 힘써야 지어미의 덕이 날로 더해 가게 된다.
노여운 마음이 움직이면 먼저 그 발단부터 억제하고, 이미 발로하였을 적에는 얼굴 빛을 온화하게 하여야 마음도 따라서 편안해진다. 노여움을 무제한 내버려두면 사고가 태산같이 커지게 된다.
규방(閨房) 안에서는 조용히 하고 떠들지 말라. 잔소리를 크게 하지 않아 그 온화함을 길러야 한다. 말소리가 집 밖에 나가지 않아야 집 안이 평온하게 된다.
바느질하고 베 짜고 음식 만드는 데에 정결하고 민첩함을 힘쓰며, 의상(衣裳)을 정제하고 침상과 방석[茵]을 깨끗이 소제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아야 선인(善人)이라 이른다.
내가 게으른 지어미를 보건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헝크러진 머리와 때 낀 얼굴로 안일하기만 힘쓰니, 아무 일도 이루어지는 바가 없고 나쁜 소문이 이웃에 퍼지게 된다.
내가 교만한 지어미를 보건대, 침선(針線, 바느질)을 힘쓰지 않으며, 부화(附和, 줏대없이 다른 사람말에 따르거나 쉽게 휘둘림)하고 남 이기기를 좋아하여 얼굴과 의복만 그럴듯하며, 망령되이 스스로 잘난 척하면서 얌전한 이를 업신여긴다.
내가 사나운 지어미를 보건대, 느닷없이 울어대기도 하며, 요괴(妖怪)로움을 좋아하고 귀신을 믿어 날로 무당과 점쟁이를 불러들이다가 만사가 와해되고 재앙이 구족(九族)에까지 미치게 된다. 집에 있으면 집을, 나라에 있으면 나라를 망치게 되니,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랴? 촛불을 보는 것처럼 뻔한 일이다. 이같은 세 지어미를 두고 보면 화순(和順)이 부족한 소치이다.
부귀한 이를 부러워하지 말고 빈궁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며, 염치를 돌아보고 근검(勤儉)으로 몸을 신칙하면 부모가 가상하게 여기고 그 즐거움이 융융하게 된다.
화(和)하고 순(順)하여 마음을 굳게 지니고, 전전긍긍하여 아침 저녁으로 외어 이 훈계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나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라.
경오년 여름에 소년 김영복 성배(金永福聖配)*가 쓴다.
*[역자주]비녀 꽂을 나이 : 옛날에 여자의 나이 15세가 되면 비녀를 꽂고 있다가 20이 되면 시집을 갔는데, 그 사이에 부모의 상(喪)을 만나면 23세에 시집을 갔다.《禮記 內則》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매훈(妹訓)’ 부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권/영처잡고 1(嬰處雜稿一) /매훈(妹訓)』-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78
**[옮긴이 주] 글말미에 나오는 소년 김영복(金永福)은 이 글의 필사자다. 청장관전서는 이덕무의 아들인 이광규(李光葵)가 편집하고 국가의 제사용 가축을 담당하던 전생서의 직장이던 이원수(李畹秀)가 필사와 교정을 했다. 이는 저자인 이덕무와 이원수의 부친인 이한술(1739-1794)이 절친한 친구라는 인연때문이라고 한다. 필사는 순조 9년(1809) 봄부터 1810년 여름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사기록에 참여한 이는 한 사람이 아니라 20여명에 이른다. 주로 이원수의 친인척들과 직장동료들이다. 청장관전서는 그 내용과 깊이에서 문학적 학문적 가치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정도로 소중하다. 이원수가 최초로 교정하여 완성한 청장관전서의 유일한 '정고본(定稿本)'은 현재 미국 UC Berkeley(버클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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