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알지도 못하고서 억지로 말할 수는 없다
일이 순조로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짐이 좋다는 것은, 아첨하고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첨하고 연약한 것이 어찌 순조로운 환경이겠는가. 이는 도리어 역경인 것이다.
재주 있고 경박한 사람은 기교(機巧)를 부림이 간사하고 천박하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기교를 부림이 간휼(간사하고 음흉함)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에, 군자들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중에 혹 간사하면서도 음침하거나 간휼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 이런 사람은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아아, 고금에 기교 부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봄철의 우는 새 소리는 화평하고 가을철의 벌레 소리는 처절한데, 이는 절후(節候)의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당우(唐虞, 중국고대의 요, 순시대) 적의 글은 혼호(渾灝 뒤섞일 혼, 넓을 호, 즉 깊고도 넓은 뜻이 어우러져 있음을 의미)하나 말세의 글들은 겉치레만 하니, 시절의 기운을 어찌할 것이가.
옛사람들은 자기의 재질을 부릴 줄 알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재주의 부림을 받는다. 자기 재질을 부리는 사람은 마땅히 쓸 데다 써먹고 또한 그만두어야 할 적엔 그만두지만, 재주의 부림을 받게 되면 한없이 날리어 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의 병폐는 부박(가볍고 경솔함)하지 않으면 반드시 융통성이 없는 법인데, 두고 보건대, 이 두 가지를 면한 사람이 대개 얼마 되지 않는다. 부박함은 동(動, 움직임, 행동이나 행위)의 유폐(流弊,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나쁜 풍속, 해로운 폐습)요, 융통성이 없음은 정(靜)의 유폐이니, 스스로 수양하려는 사람이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
뜻만 크고 곡진하지 못한 사람은 허술한 짓을 하고, 재주가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사람은 외람한 짓을 하는 것이다.
웃음에는 세 가지가 있는 법이니, 기뻐서 웃고, 감개(感慨)스러워 웃고, 취미가 맞아 웃는 것은 누구나 모두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대저 무시하느라 웃고 아첨하느라 웃는 짓은 일체 없애야 한다.
입술과 혀에서 나와 낭랑(琅琅)하고 발랄한 것은 형태가 없는 글인 것이고, 종이에 먹으로 표시되어 정연하다 들쭉날쭉하다 한 것은 형태가 있는 말인 것이다. 수염ㆍ눈썹ㆍ치아(齒牙)ㆍ두 볼을 흔연(欣然)스럽게 접할 수 있어 간담(肝肺)이 서로 통해지기는 글이 말만 못하고, 정신과 사고(意想)를 은연(隱然)한 속에서 찾을 수 있어 기맥(氣脈)이 완곡(婉曲)하게 통해지기는 말이 글만 못한 법이니, 말은 해도 문채가 없어 한 번 입에서 나와버리면 이미 흔적이 없게 되기 때문에 글로 쓴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인(至人 덕이 높은 사람)은 훼방이나 칭찬에 처했을 때, 사실이 있는 것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배부를 것도 없고 목마를 것도 없고 가려울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는 법인데, 보통 사람들은 사실이 있는 칭찬이나 사실이 있는 훼방에 있어서도 잘 대처하지 못하니, 더구나 사실이 없는 칭찬(칭찬할만 것이 아님에도 하는 칭찬)과 잘못이 없는 훼방이 있어서이겠는가.
사실이 없는 칭찬이란, 어찌 꿈속에 밥 더 주고 그림자를 긁어 주는 것과 어찌 다르며, 잘못이 없는 훼방이란, 꿈속에 마실 물이 떨어지고 그림자를 때려 주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꿈에라도 밥 더 주기를 바라고, 괴팍한 성미의 사람은 그림자 때려 주기를 오히려 한하는 법이다.
말 속에 숨은 칼날이 있음은 곧 물여우가 사람의 그림자를 쏘는 짓이니, 서로 대면하여 통쾌하게 꾸짖어버린 다음에 조용해져 뒷공론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깊이 알지도 못하고서 어찌 억지로 말할 수 있으랴.(不能深諳 何可強談)
-이덕무(李德懋, 1741~1793),『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49권/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2』 중에서 부분 발췌-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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