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서치전 (看書痴傳): 책만 보는 바보 이야기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동창ㆍ남창ㆍ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奇書]을 구한 것을 알았다.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자)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하여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리고, 깊이 생각하다가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주선(周旋 왔다 갔다 걸어다니는 것)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짖는 듯하였다. 혹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 (看書痴傳)’을 만들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 '간서치전(看書痴傳)', 청장관전서 제4권/영처문고 2(處文稿二)/전(傳)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조준하 (역) ┃ 1978


**옮긴이 주: 간서치전은 이덕무가 스스로를 '책만보는 바보(看書痴)'라 자칭하고 전(傳)을 남긴 것이다. 1793년 이덕무가 사망하자 평소 그의 학식과 재주를 아꼈던 정조는 그의 삼년상이 끝난 1795년 이덕무의 아들들에게 유고집 청장관전서를 간행하도록 친히 명하고 출간비용으로 돈 500냥을 하사한다. 또 규장각을 비롯하여 관련된 모든 관리들에게 아낌없이 출간을 지원하고 협조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특별히 이덕무의 벗 박지원에게 이덕무의 행장(炯菴行狀 형암행장)을 짓게 하였다. 행장에서 박지원은 이덕무를 이렇게 평한다.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옛사람의 취지를 구하되 답습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다...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글이나 문장 따위에서, 필요한 대목만을 가려 뽑아 적음)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배고프고 추움)’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는 도도하게 유행하는 풍속을 싫어하고 마음의 본바탕이 자유롭고 트인 것을 좋아하여, 뜻을 굳건히 지키고 운명을 믿어 담담히 욕심이 없으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수하였다.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지위 높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지녀, 하마터면 불우한 채 늙어 죽어 그대로 묻힌 채 이름이 후세에 일컬어지지 못할 뻔했다.(연암집3권/공작관문고/형암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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