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고자상 10장 강해] 본심(本心)을 잃고 사는 삶

만약 무턱대고 의롭게 죽는 것을 삶보다 심하게 바랄 수 있다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분명 구차하게 큰소리치는 말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나 곰 발바닥의 맛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와 곰 발바닥으로 먼저 비유를 들었다. 진실로 완전한 바보이거나 지극히 완악(頑惡)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들 ‘의(義)’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의’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가장 뛰어난 자는 이 말을 구실로 삼아서 ‘의’가 삶과 더불어 나란할 수도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의 아름다움이 삶의 즐거움보다 훨씬 뛰어나서, 마치 곰 발바닥과 물고기의 맛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겠는가? 


‘의(義)’의 아름다운 맛이 곰 발바닥을 대신할 수 있음을 알았다. 맹자는 ‘의’에 대해서 과연 “추환*(芻豢, 풀을 먹는 소나 말, 양 따위와 곡식을 먹는 개, 돼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우리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참된 맛을 아는 자이다.


그렇지만 동쪽 무덤 사이에서 걸식하는 자*는 물고기도 먹고, 육고기도 먹으며, 통째로 구운 것도 먹고, 고깃국도 먹으면서 다만 실컷 배부른 것만을 아름다움으로 여긴 것이니, 어떻게 곰 발바닥의 맛이 물고기를 구운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겠는가?


만약 맹자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나는 물고기도 포기하지 않고, 곰 발바닥도 포기하지 않겠다. 둘을 다 얻는 것이 좋으니 누가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맹자가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의’가 삶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속의 선비가 분명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 해석해서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밝히면서, 다만 두 구절의 말을 한번은 곧장 말하고 한번은 뒤집어 말함으로써, 의리(義理)가 더욱 밝아지고 뜻이 더욱 지극해졌다. 


두 번째 절(節)은 생사(生死)를 거듭 거론해서 앞의 첫 번째 절의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의리에 대해 해석하였다. “구차하게 얻는다.〔苟得〕”라고 할 때의 ‘구(苟)’ 자는 구차하게 얻은 삶의 맛이 물고기처럼 맛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심함이 있다.〔有甚〕”라고 할 때의 ‘심(甚)’ 자는 의로운 죽음의 맛이 곰 발바닥처럼 맛이 좋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세 번째 절은 ‘가령〔如使〕’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내가 기필코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네 번째 절은 ‘이 때문에〔由是〕’라는 말로 시작해서 문장의 기세가 솟구쳐 올라 듣는 사람이 상쾌해진다. 다섯 번째 절은 ‘이렇기 때문에〔是故〕’라는 말로 시작해서 본래의 주제를 다시 비추었고, ‘비독(非獨)’으로 이음으로써 여섯 번째 절을 일으켰다. 여섯 번째 절은 생사를 판결하는 일을 제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음을 밝혔다. 일곱 번째 절은 만종(萬鍾)의 녹(祿)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이 그 본심을 상실하는 것을 밝혔다. 여덟 번째 절은 나에게 아무런 보탬이 없는 만종의 녹을 물리침으로써 현자(賢者)가 본심을 상실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본심(本心)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삶을 살아가는 진실한 이치이다. 만약 외물(外物) 때문에 삶의 진실한 이치를 상실한다면, 그러한 삶은 거짓*이 되니 어디에 삶이 있겠는가? (苟爲外物而喪其生之實理 則其生也罔).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삶은 살아도 죽은 것이며, 현자의 죽음은 죽어도 산 것이다. 한 번의 죽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보통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현자는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이다. 


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보통 사람은 제대로 살았던 적이 없으며 현자는 죽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현자가 구차한 삶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오래도록 사는 이유가 된다. 맹자가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다.”라고 말했으니, 진실로 맞는 말이다.


아!, 누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삶을 버리는 줄 알기나 하겠는가? 가령 사람마다 모두 진정으로 진실한 삶을 살기를 크게 원한다면 무덤 사이의 술과 고기가 비록 산과 바다처럼 쌓여 있더라도 동쪽 성곽의 진흙에 불과할 뿐이다. 등창이나 치질을 앓는 가련한 자는 핥아 주는 사람 없이 냄새나는 침상에서 문드러져 죽게 될 것이다.


대체로 글을 짓는 사람은 이치에 도달한 연후에야 문장이 절로 통하게 된다. 이치에 밝지 못하고 한갓 문장만을 일삼는 자는 잘하려고 할수록 더욱 졸렬해진다. 성현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진한(秦漢) 이래로 오직 동중서(董仲舒)와 한유(韓愈) 두 사람의 글이 볼만한 것은 이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맹자》를 읽으면 문장에 보탬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맹자가 말하는 의리의 실제를 모른다면 비록 만 번을 읽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 장을 깊이 살피고 완미하여 그 이치가 실제 그러하다는 것을 터득한다면, 나열하여 서술하다가 모아서 요약하고, 종횡으로 올렸다가 내리며, 호방하고 굳세다가 갑자기 가라앉히는 서술 방식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것이다. 문장에 뜻이 있는 자 역시 마땅히 종신토록 외워야 할 것이다. (이는 근세(近世)에 ‘의(疑)’와 ‘의(義)’를 쓰는 큰 방법이다. 그러나 의리가 실제로 그러한 것이지, 한 구절 한 구절 더 깊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 문장을 부질없이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님을 모른다면 본받으려고 해도 할 수 없다.)


[역자 주]

1. 추환(芻豢): 추(芻)는 풀을 먹는 소나 양을 말하고, 환(豢)은 곡식을 먹는 개나 돼지를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이(理)와 의(義)가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소나 양고기와 개나 돼지고기가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2. 동쪽 무덤사이에서 걸식하는 자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제(齊)나라 사람을 말한다. 처첩(妻妾)을 둔 제나라 사람이 동쪽 성곽의 무덤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자에게 가서 남은 음식을 빌어먹었다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3. 거짓된 삶: 원문의 ‘기생야망(其生也罔)’은 공자가 “사람의 사는 이치는 바른 것이니, 바르지 못하면서 사는 것은 죽음을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雍也》


-위백규(魏伯珪, 1727~1798),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제10장 ', 존재집(存齋集) 제9권/ 독서차의(讀書箚義)○맹자(孟子) 부분-


▲원글출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김건우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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