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설(人說 ): 사람의 도리에 관하여

사람은 만물 중 하나이다. 팔과 다리의 운동, 코와 목구멍의 호흡, 눈과 귀의 보고 듣기, 입과 입술의 먹고 마시기, 암컷과 수컷의 교미 등은 사람과 개ㆍ돼지ㆍ승냥이ㆍ늑대가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만물 중에서 귀하고 가장 신령한 이유는 단지 그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네 가지가 없었다면 5만 4000년 동안 한 번 태어나 다행히도 사람이 되는 일이 개ㆍ돼지ㆍ승냥이ㆍ늑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사람이면서 저 많은 사물과 함께 천지 사이에 살면서 귀하지도 신령하지도 못하고 말이 문틈으로 지나가듯 잠깐 사이에 단지 따뜻하면 즐겁고 배부르면 기뻐할 줄만 알다가 인생 백 년을 지나자마자 새가 떨어지고 들짐승이 죽듯, 풀이 죽고 나무가 썩듯 할 것이니, 삶이라는 것이 어찌 허망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요행히 살면서 헛된 삶을 면치 못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사람이 부끄러움과 슬픔을 안다면 거의 그 삶을 헛되이 하지 않고 귀하고 신령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으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성인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했으니, 도(道)란 바로 인의예지를 말한다. 진실로 이 도를 들었다면 그것은 일생의 쾌락이며, 백 년을 헛되게 사는 부끄러움과 슬픔보다 훌륭한 일이다. 만일 부끄러움과 슬픔을 면치 못한다면 오히려 빨리 죽느니만 못하다. 《시경》의 이른 바 “어찌 일찍 죽지 않는가.”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인정(人情)은 언제나 존귀함을 영광으로 여기고 비천함을 치욕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존귀함이나 비천함은 하늘에 달렸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며, 나에게서 말미암지 남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늘에 달려 있고 나에게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하고 그들이 이루어 주기를 바라면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거스르고 남과 어긋나 도리어 해가 더욱 심해져서 인(仁)ㆍ의(義)ㆍ공(恭)ㆍ검(儉)ㆍ예(禮)ㆍ양(讓)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늘이 나에게 준 본성을 내가 그대로 닦는다면, 그보다 위에 있는 존귀함이 없을 것이고, 그보다 큰 영화가 없을 것이다. 비록 여대(輿儓 하인)와 아녀자, 어린아이들이라도 모두 존경하며 귀중하게 여기니, 어느 쪽이 영화가 보다 더 크겠는가.


비루하고 패악하며, 간사하고 외람되며, 사납고 괴팍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짓을 한다면, 아무리 명문 사족(士族)이라도 그보다 심한 저속함은 없고 그에 견줄 천함은 없다. 남들이 모두 비웃으며 모욕하고 능멸하며 발길질을 할 것이니, 어느 쪽이 모욕이 더 심하겠는가. 맹자가 “사람들은 모두 모욕을 싫어하면서도 어질지 못한 행동을 하니, 이는 축축한 데를 싫어하면서도 낮은 지대에 사는 것과 같다.”라고 했는데, 진실한 말이로다.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는 분수(分數, 자기의 처지와 본분을 헤아리는 것)가 가장 중대하다. 존비(尊卑)와 상하(上下)만 분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천지 사이의 모든 사물마다 당연한 분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갈옷을 입을 사람이 비단옷을 입거나, 삼베옷을 입을 사람이 모시옷을 입거나, 죽을 먹을 사람이 밥을 먹거나, 채소를 먹을 사람이 생선을 먹거나, 짚신을 신을 사람이 가죽신을 신거나, '저'라고 해야 할 사람이 '나'라고 하거나, 천천히 갈 사람이 앞에 서거나, 걸어가야 할 사람이 말을 타거나, 삿갓을 써야 할 사람이 흑립(黑笠)을 쓰거나, 열심히 일해야 할 사람이 누워서 자길 좋아하거나, 아내 한 사람만 있어야 할 사람이 축첩을 한다면 이는 모두 분수를 벗어나는 것이다. 유사한 부류들로 확장해 생각하면, 분수가 없는 일이 없고, 분수가 없는 물건이 없다.


오리가 학을 흉내 내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호랑이가 꿩을 흉내 내려고 해도 화(禍)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분수를 넘어서면 한 가지 일이 열 가지 화를 부르고, 분수를 편안히 여기면 마음이 편해지고 복이 오기 때문에 군자는 근신한다. 침을 뱉거나 코를 풀고, 오줌과 똥을 누는 사이에도 모두 당연한 준칙이 있으니, 이것이 종신토록 근심이 없는 이유이다.


사람의 화는 교만과 뻐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사람의 망녕됨은 다른 사람 위에 있으려고 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요즘 풍속에서 보고 알 수 있는 예를 들어 말하자면, 품관(品官, 벼슬자리) 하나를 얻으면 마음이 이미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져서 발걸음이 저절로 거만하고 눈초리는 남을 깔본다. 글을 하는 사람은 생원이나 진사 합격증을 받자마자 말씨가 이미 교만하고 망녕스럽다. 


가난하게 먹던 자는 돈 한 냥을 얻자마자 벌써 한 자짜리 생선을 사들인다. 투전(投箋, 도박)하는 자는 열 냥짜리 방을 얻자마자 벌써 기생방에서 잔다. 글씨를 익히는 자가 겨우 명지(名紙 과거 시험용 종이) 한 장을 쓰자마자 입만 열면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을 들먹이며 조맹부(趙孟頫, 원대의 화가 서예가)를 종처럼 멸시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겨우 《통감절요(通鑑節要)》의 〈서한기(西漢記)〉를 읽자마자 읽지 않은 책이 없는 것처럼 으쓱거린다. 시 짓기를 연습하는 자는 겨우 10편의 시와 7장의 의(疑)를 짓자마자 8체(體)를 모두 잘한다고 말하며, 지(之)ㆍ호(乎)ㆍ자(者)ㆍ야(也)를 가지고 짜 맞추어 몇 줄을 만들고는 곧 조 칠보(曹七步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지은 천재 시인 조식(曺植))라느니, 이 의마(李倚馬 말에 기대 있는 동안 글을 지은 이백(李白))라느니 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헛된 명예를 도둑질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란다. 


작게는 몸을 망치고 이름을 손상하며, 크게는 집안을 망치고 가문이 뒤집어진다. 온 세상이 미혹되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요행(행운)을 바라는 습속이 도도히 풍속을 이루었다. 선비들은 겨우 백일장에서 우등하면 이미 어사화(御賜花)를 보관할 판자를 준비하고 피리 재질을 점검하며, 품관은 겨우 존위(尊位 마을의 집강(執綱, 요즘 말로하면 이장, 통,반장))를 얻으면 이미 풍헌당(風憲堂)의 수석(首席)을 엿본다. 조정 관리는 한 장의 임명장을 받자마자 의정부 대문에서 걷는 연습을 하며, 서리(胥吏, 하급 말단관리)는 겨우 서리 복장을 입자마자 서른 살 전에 이방(吏房)이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승려는 겨우 초심식경(初心食經)을 읽자마자 이미 대사(大師)라고 부르며 노복(路卜 짐꾼이나 행자승)을 벗어나자마자 이미 주지나 총섭(總攝, 승군을 총괄하는 승려의 직책)을 차지하려고 기대한다. 남의 종이 겨우 아내를 얻고 고가(雇價, 품삯)를 받자마자 속량(贖良, 몸값을 지불하여 노비에서 양민으로 신분전환하는 것)하기 위해 보충대(補充隊)에 들어갈 꾀를 낸다. 점치는 자는 겨우 비복신(飛伏神)을 붙이자마자 이미 소 강절(邵康節 소옹(邵雍))이나 원천강(袁天綱 관상을 잘 보았다는 당나라 사람)이라고 부르며, 지남철을 든 지관(地官)은 겨우 24방위를 알자마자 곧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정했던 일과 주자(朱子) 묘지의 풍취나대(風吹蘿帶)를 말하니, 이는 모두 개미가 호랑이를 본떠 달려들고, 메추라기가 붕새를 흉내 내어 치고 오르는 격이다. 


작게는 한 발을 잘못 딛어 아홉 구덩이로 떨어지고 크게는 자기 몸이 빠져 구족(九族)이 패망한다. 위로는 교만과 뻐기는 것이 병통의 빌미가 되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위에 있고자 하는 태도가 화의 근원이 되니, 두렵지 않은가, 슬프지 않은가? 《시경》에 “연줄로 삼지 말라, 욕심내거나 부러워하지 말라.”라고 했는데, 상제(上帝)가 말한 덕을 밝힌 것이 이 여덟 자에 지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문왕(文王)과 같다면 다시 무엇을 찾겠는가?


연줄로 삼거나 부러워하는 것은 모두 남의 위에 있고자 하는 마음이다. 마지막에는 교만이 생기고, 교만하면 패망할 것이니, 어떻게 문왕처럼 백리의 땅을 가지고 8백 년의 기틀을 이루겠는가. “온화하게 남에게 공경하니, 덕의 기틀이다.〔溫溫恭人 維德之基〕”라고 했으니 이는 진지한 말이다.


사람들은 크게 될 수 없는 것을 걱정한다. 대체로 큰 것으로는 지혜가 큰 경우도 있고, 식견이 큰 경우도 있으며, 효과가 큰 경우도 있고, 사모하는 것이 큰 경우도 있으며, 크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크게 여기지 않는 게 없으면 지극히 작은 자이다. 오직 하늘은 스스로 크다고 하지 않으나 그보다 큰 것은 없다. 초명(焦明)은 모기를 크게 보고 모기 눈썹에 살지만, 날아다니는 먼지가 초명을 크다고 하는 일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촌사람들과 잔치에 갔는데, 음식이 제법 많았다. 어린 손녀가 늦게 왔는데 이미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다가 잔칫상에 남은 꼬막 5개를 모으고 그릇에 있는 고기와 채소로 만든 단자 다섯 꼬치를 긁어모아 주었다. 양 손아귀에 가득 차자 손녀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방에서 팔짝팔짝 춤을 추며 세 오빠를 불러 나누어 주면서 “내가 촌 잔치에 갔더니 음식이 무척 많았다. 할아버지가 이것을 내게 주셨다.”라고 말하면서 웃느라 떠들썩했으며 자랑이 극히 대단했다. 내가 보고는 웃으면서 “이 아이가 모기 눈썹에 둥지를 틀었구나.”라고 했다. 만일 파리나 모기가 이를 얻었다면, 그들이 스스로 크게 생각하는 것이 어찌 조타(趙佗)가 남월(南越)을 얻은 것이나 강아지가 뒷간을 만난 것보다 못하겠는가.


옛사람들은 ‘교(驕)’ 자를 ‘일(溢)’ 자와 붙여서 교일(驕溢)이라고 했다. 일(溢)이란 그릇은 작은데 물이 많을 때 생기는 우환이다. 그릇이 크면 바다처럼 물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산처럼 흙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하늘처럼 만물을 덮어도 넘치지 않고, 땅이 만물을 실어도 넘치지 않는다. 그릇이 작으면 이와 반대이다. 넘치면 패망한다.


요순(堯舜)이 천하를 가지고도 상관하지 않았으니, 상관하지 않은 것은 천하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지 않았던 것이다. 요순의 마음에 어찌 일찍이 내가 천자가 되었다든가, 내가 천하를 차지했다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띠를 얹은 흙집에 살고 농부로서 남풍을 맞으며, 마음속으로는 항상 천자와 천하를 잊었다. 마음이 이미 비었으니 어떤 사물을 넘치게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도량은 천지와 같아서 넘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덕을 기린 사람이 요(堯)에 대해서는 진실로 공손하다고 했고, 순(舜)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공손하다고 했으며, 우(禹)에 대해서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고, 탕(湯)에 대해서는 공경스럽게 올랐다고 했으며, 문왕(文王)에 대해서는 아름다고 공손하다고 했고, 무왕(武王)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공자(孔子)에 이르러서는 결국 온화하고 어질어 공경스러웠고 검소했으며 겸양이 있었다고 했다.


공(恭 공손)이란 교(驕, 교만할 교)와 대조된다. 그래서 공이 크면 교가 작다. 공은 하늘이고 교는 사람이다. 공하면 덕이 높아지고 날로 더욱 귀해진다. 교하면 덕이 이지러지고 날로 더욱 천해진다. 성인이 항상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고, 깊은 연못가에 서 있듯이 하라.〔如履薄冰 如臨深淵 여리박빙 여림심연〕”라고 했는데, 자신이 연못이나 얼음 위에 있으면 덜덜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편치 않으니, 어느 틈에 교만하겠는가?


하나라 걸(桀)이나 은나라 주(紂)는 천자가 되어 천하를 가졌다는 마음 때문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아니면 배부르지 않았고, 경궁(瓊宮)이나 옥문(玉門)이 아니면 거처하지 않았다. 몸은 남소(南巢)에서 죽었고 옥(玉)은 목야(牧野)에서 불탔다. 필부(匹夫)가 되려고 해도 될 수 없고 송곳 하나 꽂을 곳을 찾아도 둘 데가 없었으니, 그 천자나 천지는 어디로 갔는가? 작은데도 넘쳤던 자의 재앙이 과연 이와 같도다.


동탁(董卓)의 국량(局量,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度量)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재주)은 미오(郿塢)에서 자만했으니 배꼽에 심지를 꽂아 태우는 욕을 당하며 죽었다. 가사도(賈似道)의 국량은 바야흐로 많은 보물에서 가득 찼으니 무명옷을 입고 귀양 가서 피살되었다. 한 문제(漢文帝)는 노대(露臺, 향락과 사치를 위해 만든 화려한 건축시설을 뜻함)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큰 창고에 곡식이 썩을 정도로 많았고, 광무제(光武帝)는 옥관(玉關)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들이 명당(明堂)에 앉았다.


만고의 군신(君臣) 중에 자만하지 않은 자가 몇 명이며, 넘치지 않는 자가 몇 명이던가. 오직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은 장상(將相)이면서도 필부처럼 지냈고, 제갈량(諸葛亮)은 천하가 삼분된 상황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노래했으며, 사마광(司馬光)은 평장사(平章事)로 군국(軍國)을 맡다가 말 한 필에 시동 둘을 데리고 지냈으니, 이들이 남들보다 고결한 것이 몇 등급이던가. 어떤 사물도 그들의 국량을 채울 수 없었으니, 아아, 위대하도다.


사물 중 작은 것을 한 번 보자면, 뜰 파인 곳에 뜬 지푸라기는 비가 몇 방울 떨어지면 넘쳐서 엎어지며,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머무는 작은 비둘기는 바람이 불면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황하를 마시는 두더지는 반 홉을 마시면 배가 터지며, 비 맞은 진디등에는 볕이 나자마자 날개가 마른다. 아침 버섯은 햇빛이 들면 시들고, 가을벌레는 서리가 내리면 폐사한다. 이 모두 바야흐로 득의에 차 있을 적에 어찌 한껏 만족스럽지 않았겠는가. 기본 그릇이 본래 작아서 바로 사물에 가리게 되니, 참으로 가소롭다. 사람 중에도 물에 뜬 지푸라기나 진디등에처럼 돛을 달려고 하고 하늘로 오르려 하니, 너무도 생각이 없다. 어찌 슬프지 않은가.


사람의 의복은 몸을 덮어 추위를 막는 것이다. 그런데 빈부와 귀천에 따라 두텁고 얇거나 거칠고 화려하여 각각 당연한 분수가 있다. 그 분수는 실오라기만큼도 어기거나 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빈부나 귀천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똑같고 다르지 않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나무꾼의 마음에 경상(卿相, 고관대작)의 비단옷을 입은들 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마공(司馬公 사마광)의 마음에 서민의 베옷을 걸친들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의복이란 몸의 밖에 있는 물건이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지금 진흙투성이 돼지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힌다면 보는 사람이 과연 그 옷을 입었다고 해서 사랑하겠는가. 호랑이나 늑대에게 갓이나 면류관을 씌운다면 보는 사람이 과연 그 관을 썼다고 해서 무서워하지 않겠는가. 자로(子路)는 해진 솜옷을 입었어도 남들이 더욱 사랑하고 아름답게 여겼으며, 진(晉)나라 부자 왕개(王愷)는 불에 타지 않는 화완포(火浣布)를 입었어도 사람들이 더욱 비웃으며 증오했으니, 의복이 과연 사람과 상관이 있는가.


마음이 어질지 못한 자는 자기 마음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의복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분수를 돌아보지 않고 재력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의복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는 데만 힘쓴다. 겨우 명주옷 하나를 얻으면 발꿈치가 이미 높아지고 눈초리가 이미 번쩍인다. 겨우 비단 주머니 하나, 색동 허리띠 하나를 빌리면 말씨가 교만하고 망녕되어 이미 여러 숙부에게 자(字)를 부르면서 자신이 금수의 마음과 금수의 속내가 된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니, 비단 주머니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하물며 이 때문에 가업(家業)이 탕진되어 항아리에 쌀 한 말이 없고, 아이와 아내는 때 묻은 발에 신을 버선도 없으며, 늙은 부모는 장차 흘간산(紇干山)의 얼어 죽은 참새가 되는 데이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좋아서 시대의 유행을 논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뻐기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자로가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이런 점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사람이 배를 채우고 죽음을 면하는 수단이다. 현미나 콩잎은 진귀한 음식과 맛있고 나쁜 차이는 있지만 배를 채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포(脯, 말린 음식)가 숲을 이루고 술이 연못을 이루면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목야(牧野, 초식동물이 노니는 들판)의 차디찬 재가 되어 두골(頭骨, 유골)을 보전하지 못하며, 푸성귀 식사와 맛없는 술이 진미는 아니지만 검소한 대성인(大聖人)은 만고에 죽지 않으니, 그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


그렇지만 사람의 도량은 만 가지 품격이 있어 다 같지 않다. 채택(蔡澤)은 세상에서 말하는 대장부였지만, 그가 자랑했던 것은 좋은 곡식과 기름진 고기를 먹는 것이었으니, 지기(志氣, 뜻과 기개)가 가련하고 국량이 애석하다. 대장부의 마음에는 현명한 임금을 만나 나의 도를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작위는 저절로 귀해지고 봉록은 저절로 후해질 것이지만, 단지 싫어하지 않을 뿐 즐기는 바는 여기에 있지 않다. 만일 그것을 즐거워했다면 안연(顔淵)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 사는 삶을 반드시 걱정했을 것이며, 증자(曾子)의 노랫소리는 반드시 금석처럼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안연과 증자는 만고(萬古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음)의 제사를 받아 그 귀신이 항상 배부르다.


물 대신 엿을 솥에 끓이고, 밀랍을 때서 밥을 지어먹은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은 동시(東市)에 버려진 혼이 되어 구름처럼 사라지고 풀잎처럼 썩었다. 그들의 평생은 단지 개돼지가 술찌개미 죽을 실컷 먹고 소나 말이 여물을 물리게 먹은 것과 같았고, 살과 뼈가 오직 식탐하는 자의 입에 이바지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개와 말의 포식(飽食 배불리 먹음)이었으니, 과연 그들에게 무슨 보탬이었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이나 동물은 매번 끊임없이 배불리 먹기 위해 애쓰다가 스스로 재앙의 함정에 빠진다. 물고기는 향기로운 낚시밥에서 죽고, 짐승은 헐떡이며 찾은 먹이 때문에 죽으며, 새는 곡식을 탐내다가 죽고, 사람은 녹(祿, 봉급,보수 혹은 댓가)을 구하다가 죽는다. 만고에 도도히 휩쓸려 깨닫지 못하니, 모두 물고기처럼 살다가 새처럼 죽게 되니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맹자가 말하기를 “음식을 밝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히 여긴다.”라고 했는데, 천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태어나 사람이 되었으니, 진실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다면 군자가 선택할 바를 안 것이다.


일반적으로 음식과 의복, 궁실(宮室)과 기용(器用)은 모두 밖에 있는 물건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바는 사람에게 있지 그것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몸으로 재물을 일으키는 자는 오로지 의식만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금수(禽獸 짐승을 통털어 뜻하는 말)가 된다. 이것이 고호(賈胡)가 배를 갈라 옥구슬을 숨겨 오는 꼴과 무엇이 다른가. 아아, 너무도 생각이 없도다.


설령 어리석은 자가 먹을 때는 생선과 고기를 갖추고, 입을 때는 수놓은 비단옷으로 화려하게 차린다면, 보는 사람이 과연 공경하고 두려워하겠는가. 스스로 돌아보아 스스로 깨닫기 바란다. 부귀와 빈천은 모두 내가 태어날 초기에 운명이 있었던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없다. 힘으로 구하려고 하는 자는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이 더없이 수고로울 것이고, 재앙도 수반하여 이를 것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에 “이(利)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폐해가 이미 수반된다.〔求利未得而害已隨之〕”라고 했으니,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군들 읽고 외우지 않겠는가마는 자기 몸에 돌아보아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니, 슬프도다.


부자(父子)의 친함은 지극한 천륜(天倫)이다.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의 효성으로도 그 마음이 도리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 못하다. 더구나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일 반푼이라도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그래서 경전에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효자”라고 했고, 맹자(孟子)는 “봉양만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는 돼지로 기르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사랑이 없는 죄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평상시 사랑이 없다가 부모가 돌아가시기에 이르면, 길지(吉地)를 얻어 복을 받으려는 마음이 속에 가득 차서 소와 돼지를 잡고 돈을 낭비하면서까지 지남철을 찬 지관(地官)을 받들어 친애하고 공경하며 자신의 마음과 힘을 다한다. 자기 부모가 살았을 때 과연 이런 정도의 성심이 있었던가. 저 조물주가 어찌 기꺼이 길한 땅을 그에게 주어 장구한 복을 허락하겠는가. 아아, 어리석도다.


군신(君臣)의 의리는 커다란 인륜(人倫)이다.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일하면 내 몸은 영예롭고 귀해지며 아름다운 음식과 좋은 옷에 가문을 높고 크게 할 수 있으니, 그 은혜가 나를 낳아 준 부모와 같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국상(國喪)이 있으면 한결같이 아버지의 상에 준하는 의리가 있었으니, 이는 구차하게 이렇듯 견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비록 나를 낳았지만, 임금이 없으면 그 삶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여러 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군자는 그런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임금이 죽으면 같이 죽었으니, 보은하는 도리는 효(孝)와 마찬가지이다.


삼대(三代) 이후 곁길이나 지름길로 부귀를 찾아 얻으면 자기 힘이라고 생각하고 임금의 은혜로 여기지 않았다.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해치며 하지 않는 짓이 없으면서도 남에게 말할 때면 으레 “성은이 망극하다.”라고 하니, 그 마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죄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다.


임금을 속이는 것은 반드시 조정에서 기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악독하고 법령을 위반하며, 재물을 좀먹고 물건에 해를 끼치는 것 모두 임금을 속이는 일이다. 한(漢)나라의 위상(魏相)과 병길(丙吉), 소신신(召信臣)과 두연년(杜延年) 외에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라에 벼슬하여 부귀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유향(劉向)과 소망지(蕭望之)는 군신의 은혜와 의리가 있었으나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은 그것을 잊은 자이며,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은 은혜와 의리가 있었던 사람이고 조절(曹節)과 왕보(王甫)는 그것을 저버린 자이다. 역대로 모두 그러한데, 은혜와 의리가 있으면 임금이 죽으면 역시 죽고 나라가 망하면 역시 망한다. 만일 잊고 버리게 되면 모두 활을 들지 않은 유궁(有竆)의 예(羿)이고 창을 들지 않은 성제(成濟)이다.


부부(夫婦)의 분별은 긴밀한 인륜이다. 이성(異姓)이 살을 합하고 정과 뜻에 틈이 없이 천지와 덕을 함께하고 만물을 변화시켜 이루는 관계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단지 암수의 정만 있어서 친숙해져 분별이 없고 친압(親押 지나치게 친함)하고 구차하게 합친다. 지나치게 친하면 큰 화를 만들어 내고, 심하게 소원해지면 가는 길이 어긋난다. 그래서 옛 군자들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고 사사로운 모의도 없었고 이유 없이 남의 말을 듣는 일이 없었다. 서로 본보기가 되고 올바른 본분이 있어서 백 년 동안 같은 덕을 가지고 큰 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이 오륜(五倫)의 근본과 시작이 되는 이유이다.


장유(長幼)의 질서는 아름다운 인륜이다. 나이의 선후는 하늘이 낳은 것이지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뒷사람이 당연히 앞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지 힘으로 능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린 질서이다. 그 순서를 따라서 차례대로 공경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일마다 어지럽지 않고 사람의 이치도 순조롭게 완성된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공경하여 섬기는 것이지, 잘나고 못나고, 귀하고 천하고, 어리석고 지혜롭고의 차이가 나는 형세 때문에 억지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질서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니, 내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른 뒤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순서를 건너뛰며 능멸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풍속이 한번 어긋나면 자신의 나이가 어른이 된 뒤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다시 나를 능멸하리라는 점을 전혀 모르는 것이니, 너무도 생각이 없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어른 뒤에서 천천히 가는 것을 공경이라고 말한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어렵지 않은 일인 듯하지만, 행동하기는 매우 어렵다. 마음에 순순한 덕이 없으면 어려서부터 이미 어른 뒤에서 갈 수 없다. 뒤에서 갈 수 없으면 온갖 악이 두루 갖추어진다.


붕우(朋友)의 믿음은 인륜의 완성이다. 사람이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임금을 섬길 수 없으며, 집안을 화목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옛 성인은 특별히 이 믿음을 가져다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형제(兄弟)에 같이 넣어 오륜(五倫)으로 삼았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그 마음에 성실함이 없는 것이다. 성실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과연 사람의 도리를 다하겠는가.


그렇지만 이른바 붕우란 오늘날 얼굴이나 알고 지내며 소매를 잡아끌고 어깨를 치는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나이를 물어 친구를 허락하다가 끝에는 헌 짚신처럼 버리니, 무슨 벗다움이 있겠는가. 붕우의 믿음은 단지 정과 뜻이다. 정이 통하지 않으면 사사건건 어긋나고, 뜻이 같지 않으면 하는 일마다 잘못된다. 어긋나면 서로 해치고, 잘못되면 서로 버리며, 이미 해치고 버리게 되면 비밀을 지키던 사이에도 칼을 어루만지고 어려울 때의 친구에게도 돌을 던진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정보다 큰 것이 없다. 인정이 없으면 부자 사이가 길 가는 사람처럼 되고, 형제 사이가 원수가 된다. 부형을 길 가는 사람으로 보면서 어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형제를 원수로 보면서 어떻게 아내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붕우의 믿음은 마치 오행(五行)에 토(土)가 있는 것과 같으니, 토가 없으면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이 모두 빈다. 그 이치가 정말 그러하다.


효(孝)는 순덕(順德, 도리에 따라 공손하게 따르는 덕)이다. 순(順)이란 공손과 삼가는 일 모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시경》에 “온화하도다, 공손한 사람, 덕의 기틀이네.〔溫溫恭人 維德之基〕”라고 했는데, 옛사람이 효를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말했던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효자는 부모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하고, 사랑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기쁜 얼굴빛이 있고, 기쁜 얼굴빛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순한 용모가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역시 사람이니, 어찌 걱정하거나 화나는 일이 없겠는가? 다만 지극한 사랑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걱정과 분노가 아직 형체가 없을 때 살피고 소리가 없을 때 들음으로써 마치 얼음이 풀리고 바람이 멎는 듯하다. 부모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잠자리 문안 때에 얼굴이 자연 화락하여 마치 봄꽃이 해를 맞듯, 비 맞은 버드나무가 바람을 따르듯 하기 때문에 경전(經傳)의 사친(事親)에 대한 절목에서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혀 말소리를 즐겁게 하고, 얼굴빛을 순순히 하고 기쁜 낯을 한다.〔下氣愉聲 順色怡顔〕”라고 했으니, 효자가 반드시 이렇게 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이와 같은 것이다. 깊이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부모를 대할 때 비록 억지로 화락하고 기뻐하려고 해도 눈썹과 미간이 찡그려지고 마음속이 꼬여서 끝내 화해할 수 없으며, 닿는 데마다 어긋나고 부딪혀서 남에게 공손할 수가 없다. 어찌 모든 행동의 근원이자 덕의 기틀이 될 수 있겠는가.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효자는 집안사람들과 싸우고 어긋나며 고을 사람들을 이기려 들며 다투어 돈과 재물을 훔치고 다른 사람과 소송을 걸며, 심지어 형제와도 원수가 되고 부부 사이에 반목한다. 이들이 비록 날마다 소와 양, 돼지 등 세 종류의 희생(犧牲)을 써서 봉양하고 해마다 수놓은 비단옷을 바치더라도 효(孝)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더구나 필경 몸은 죽음을 당하고 집안은 망하는 일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 몸은 바로 부모의 몸이고, 내 집은 곧 부모의 집이니, 패가망신에 이르면 부모가 과연 좋은 음식과 따뜻한 옷이 있다고 편안하겠는가. 


효는 아름다운 이름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좇기 때문에 이름을 훔치려고 효도하는 자들이 많다. 평소 기쁜 얼굴이나 즐거운 모습, 화락한 행동이나 순덕(順德), 따뜻한 말이나 아름다운 행실이 없다가 단지 우환이 급박히 닥쳤을 때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를 베는 자 중에는 더러 스스로를 속이고 이름을 구하는 자들이 있다. 자신을 속이면 하늘을 속이게 되고, 하늘을 속이면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린다.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를 베는 행위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그렇게 한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1푼이라도 효에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면 그 행위는 효이지만 그 사람은 효가 아니다. 효는 1푼이라도 성인의 효에 미치지 않으면 1푼 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자식과 합하지 못하고, 친족과 화목하지 못하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효자가 아니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나 홀아비와 과부를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도 효가 아니다. 옳지 않은 재물을 함부로 가지는 것도 효가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초목을 함부로 베는 일, 아무 이유 없이 닭이나 개를 함부로 죽이는 것도 효가 아니다. 술과 음식을 탐내며 즐기는 것도 효가 아니고, 경솔하게 구타하는 것도 효가 아니다. 몹시 화가 나서 함부로 욕을 하는 것도 효가 아니다.


부모가 죽으면 이윽고 “나는 구애될 게 없다.”라고 하면서 멋대로 행동하고 멋대로 그만두는 것은 효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애쓰고 부귀를 부러워하는 것은 효가 아니다. 부모가 죽으면 늙었다고 자임하는 것은 효가 아니다. 재화가 없으면서도 의복과 물품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는 것은 효가 아니다. 이름과 절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옛 사적을 좋아하지 않고 옛사람을 흠모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효에 뜻을 가지고 온전하게 하면 군자가 되고, 적어도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는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 부모에게 돌아가니, 생각해 보면 그 효다움이 크지 않겠는가.


서(恕, 용서할 서,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줌, 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는 삼재(三才)의 공통

된 이치이다. 천도(天道, 하늘의 도)는 서가 아니면 해와 달이 밝을 수 없고, 바람과 비가 불거나 내리지 못하고, 만물이 생겨날 수 없다. 지도(地道, 땅의 도)는 서(恕)가 아니면 산과 강이 각박해지고 만물이 서로 밀어낸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는 서(恕)보다 큰 것이 없으니, 남을 자신처럼 보고 만물과 나 사이에 간극이 없이 천지와 덕을 함께한다. 자기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모를 섬길 때 효도하는 것이고, 자기 아랫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임금을 섬길 때 충성하는 것이며, 벗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몸을 돌아보아 믿음을 갖는 일이다. 매사에 오로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늘 저 사람의 마음을 스스로 헤아리면 천하에 난처한 일이 없을 것이고 자신은 곧 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충(忠)은 체(體)이고 서는 용(用)이다. 나의 마음을 다하면 서(恕)는 저절로 다하게 된다. 서(恕)를 다하면 충이 저절로 완전해진다. 천지는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으니 충이며, 만물이 각각 성명(性命)을 정했으니 서(恕)이다. 공자의 도는 이 두 글자일 뿐이니, 하늘과 하나가 된다. 사람이 서(恕)에 마음을 두면 이것이 곧 하늘을 배우는 것이니,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도 어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단지 자기가 있는 줄만 안다면 자신의 몸은 더욱 비천해진다. 남을 자신처럼 보면 자신의 몸은 더욱 존귀해진다.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일삼다가 심지어 자기를 망치게 된다. 이는 그 하늘이 망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심(猜, 시기할 시)은 만 가지 선(善)의 원수이며, 백 가지 악(惡)의 우두머리이다. 남의 선함을 보면 자기에게 있는 듯 기뻐하고 따라 배우면, 그 선이 자기에게 있어서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된다. 갑(甲)에게 하나의 선을 배우고, 을(乙)에게 하나의 선을 배우며, 병(丙)에게 하나의 선을 배워서, 합하여 온전하게 되면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니, 어찌 크지 않은가. 그래서 대순(大舜, 순임금)은 남의 선을 인정하기를 잘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에게서 가져다 선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위대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미혹되어 남의 선함을 보면 샘을 내고 시기하며 다치게 하고 해코지한다. 다치게 하고 해코지하는 데 이르게 되면 많은 선 중에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모든 악이 자기에게 모여, 종내 흉악한 사람이 될 뿐이다. 위로는 공공(共工)과 환두(驩兜)부터 아래로는 남곤(南衮)과 심정(沈貞)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임금을 만나 밝은 시대를 살았는데도 흉인을 면치 못했으니, 모두 시기심(猜, 시기와 질투)이라는 한 글자가 그 빌미가 되었다. 그 나머지 천고의 소인(小人)들이 어찌 재주와 지혜, 교묘한 변설이 없었겠는가마는, 모두 이 한 글자가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금수(禽獸)로 전락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진서(秦誓)〉에 “남이 재능이 있으면 그 마음에 좋아하기를 마치 자기 입에서 나온 것처럼 여길 정도에 그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라고 했는데, 어찌 믿을 만한 말이 아니겠는가?


상등(上等, 인격이 상등)인 사람은 자기 마음을 두려워하고, 그다음에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그다음엔 남을 두려워한다. 최하인 자는 두려워하는 게 없다. 마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차마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히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며, 남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릇된 일을 할 수 없다. 두려워하는 게 없는 자는 못하는 짓이 없다. 못하는 짓이 없던 사람 중에 큰 자로는 왕망(王莽)과 양광(楊廣)이 있고, 작은 자로는 조고(趙高)와 이임보(李林甫)가 있다. 더 작은 자는 남의 집 담장을 뚫거나 넘어가 도둑질하는 자이고, 더 작은 자는 음식을 탐내는 사람이다.


부끄러움(恥)은 사람에게 중대하다. 군자는 성인과 같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성인은 하늘과 같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다. 도둑질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씨름 같은 겨루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바둑이나 장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음행(淫行)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음식이나 의복이 좋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니, 비루하도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인설(人說)', 존재집(存齋集) 제15권/ 잡저(雜著)-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오항녕 (역) ┃ 2013


TAGS.

Comments